HOME  >  시사  >  종합

前 남편 난동 신고하자… 경찰 “잘 살아보라”

여성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가정폭력에 대한 치안 및 사법당국의 강력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여성의전화 제공]


A씨는 15년간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렸지만 경찰의 도움은 받지 못했다. 그는 “전 남편이 이혼 후에도 ‘찢어죽이겠다’며 문을 부숴 경찰에 신고했더니 ‘왜 이런 일로 경찰까지 부르냐. 잘 살아보라’는 말을 들었다”며 “수사과정에서 더 큰 좌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수년간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B씨는 “경찰을 불렀지만 ‘그래도 아빠인데 신고하면 어쩌냐’ ‘아빠 집에 같이 있기 싫다는 게 말이 되냐’고 나무라기만 했다”며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시민단체는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연 ‘국가의 가정폭력 대응 강력규탄’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피해 사례를 고발했다. 이들은 국가의 대응체계 부실 속에서 ‘서울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등 가정폭력에 의한 살해가 끊이지 않는다고 규탄하며 전면적인 시스템 쇄신을 촉구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지난 9년간 최소 824명의 여성이 연인이나 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됐고 602명이 살해될 위험에 처했다”며 “응급조치와 (긴급) 임시조치 등 피해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가 있지만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을 ‘강서구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의 친구라고 밝힌 C씨도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해 “진작 가정폭력에 대한 강력 처벌 탄원서를 넣을 걸 후회스럽다”며 “이혼 후 협박에 시달리던 친구는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해했다. 친구가 한을 풀 수 있도록 가해자에게 사형이 선고되게 도와 달라”고 울먹였다.

김명진 ‘여성인권 실현을 위한 전국 가정폭력상담소연대’ 준비위원회 위원은 “2015년부터 올해 6월까지 가정폭력으로 검거된 이들 중 99%가 풀려났고 구속률은 1%가 채 안 된다”며 “형사기소가 돼도 검찰에서 상담 받으면 기소하지 않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가 있다”고 제도의 부실함을 지적했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2013년 경찰청 자료를 보면 경찰 내부에서 ‘가정폭력 사건은 가정 안에서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인식 비율이 57.9%”라며 “가정폭력 피해자가 최초로 만나는 공권력인 경찰이 외면하는 사이 피해 여성은 죽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