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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태원준] 안전한 이별



A씨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 건 집착 때문이었다. 감시하듯 불쑥불쑥 학교에 찾아오고 수시로 휴대전화를 빼앗아 문자메시지를 검사했다. 저녁에 친구들과 어울리면 기어코 그 자리에 나타나 분위기를 망쳤다. 관계를 정리하려 연락을 끊었더니 집에까지 와서 고함 치며 행패를 부렸다. 할 수 없이 만남에 응하던 A씨는 이별의 방법을 바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남자친구 회사에 불쑥 찾아가 그와 대화하는 여직원에게 시비를 걸었다. 회식 자리에 쫓아가 2차까지 따라다녔다. 사흘에 한 번씩 결혼 얘기를 꺼내며 돈은 얼마나 모았는지 캐물었다. 만날 때마다 뭐든 사 달라 하고 사줄 때까지 졸랐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 과정을 공개한 그는 긴 글을 이렇게 맺었다. “3주쯤 지나자 연락이 뜸해지더니 먼저 헤어지자 하더군요. 안전이별에 성공했습니다.”

익명의 글이라 검증은 어렵지만 허무맹랑한 얘기로 치부할 수도 없다. 이런 식의 ‘안전이별 후기’는 인터넷에 무척 많고 공감하는 이들이 큰 관심을 보이며 비슷한 경험담을 공유하고 있다. 안전이별은 스토킹이나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인관계를 끊는 것을 뜻한다. 결별 선언이 살인까지 부르는 이별범죄가 잇따르자 생겨난 말이다. 이별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는 아픔이나 슬픔이었는데 올해 들어 안전이 연관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역시 온라인에서 회자된 B씨의 이별에는 5가지 방법이 동원됐다. ①거칠게 욕하다 갑자기 애교 떨기 ②다정한 커플을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울기 ③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④취업 포기하고 시집가겠다고 말하기 ⑤바람피우는 거냐고 의심하기. TV 프로그램에 사연이 소개됐던 C씨는 남자친구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받아낸 뒤에도 며칠간 “누구랑 바람난 거냐” 같은 집착 문자를 계속 보냈다. SNS에서 자신을 완전히 차단하게 하려는 확인사살이었다. 핀테크로 보급된 간편송금도 이별의 기술로 활용된다. 세 사람은 연인에게 수시로 돈을 꿔 달라고 하는 방법을 공통적으로 사용했다.

지난주 부산 일가족 살인사건과 서울 주차장 살인사건은 모두 이별범죄였다. 목숨 걸고 이별하는 세상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다. 이별은 시간의 담금질을 통해 아픔을 추억으로 만드는 긴 과정이었는데, 치밀한 전략 아래 서둘러 정을 떼야 안전한 절차가 돼버렸다. 이별을 둘러싼 범죄는 처벌로 막는다지만 로맨스가 스릴러로 변질되는 세태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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