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음식이야기] 설탕이 부른 전쟁

각설탕과 설탕가루


설탕은 후추와 함께 중세 유럽의 중요한 무역 품목이었다. 하지만 1453년 오스만튀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설탕 교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탕수수 재배 지역인 이집트와 키프로스가 점령되면서 유럽으로의 설탕 공급이 끊겼다. 그 뒤 사탕수수는 신대륙에서 경작돼 유럽으로 수출됐다. 161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맨해튼에 지금의 뉴욕을 건설하면서 아메리카 항로를 전담하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무역과 식민지 개척을 독점 수행하는 특권회사였다. 해적질도 서슴지 않는 전쟁기업이었고 모피, 노예, 사탕수수를 집중 거래했다.

포르투갈에서 추방돼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브라질로 건너갔다. 1630년 레시페 등 3개 도시를 거점으로 사탕수수를 본격 재배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645년 포르투갈이 다시 브라질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자 네덜란드는 1654년 1월 레시페를 포르투갈에 양도한 것이다. 그곳 유대인 1500여명은 다시 카리브 연안 서인도제도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 농장이 대규모로 만들어졌다. 유대인들은 이윤이 많이 남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와 농장에 투입했다. 이른바 노예, 담배, 설탕의 삼각무역으로 유럽에 가는 설탕이 폭증해 유럽 이 설탕의 단맛에 빠지게 됐다.

고가의 설탕 교역을 둘러싼 경쟁은 영국과 네덜란드 간 전쟁을 불렀다. 영국 ‘항해조례’가 발표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22년 간 세 차례 전쟁을 했다. 당시 사탕수수 경작지인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섬은 영국령이었지만, 설탕 교역은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주도했었다. 바베이도스섬의 유대인들과 교역하던 네덜란드 상선 13척이 영국 함대에 나포되자, 이를 발단으로 1652년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1655년부터 설탕 무역 종주권을 차지했다.

세종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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