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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땅을 태어나서 처음 밟은 것 믿기지 않아”

경영인들의 역사연구 모임인 실크로드경영연구회 후원으로 난생처음 한국 땅을 밟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할머니들. 오른쪽부터 허 엘리자베타, 강 이라, 안 류드밀라. 최현규 기자


“(한국 여행은)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만 생각했지.”

1주일간의 여행을 마친 고려인 할머니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카자흐스탄에서 살아온 강 이라(71), 안 류드밀라(69), 허 엘리자베타(66) 할머니는 지난 16일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경영인들의 역사 연구 모임인 실크로드경영연구회의 후원으로 제주도와 경주, 서울 등 곳곳을 방문했다. 출국 하루 전인 2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본사에서 이들을 만났다.

할머니들은 인터뷰 내내 한국어를 섞어 썼다. 처음에는 “잘하지는 못한다”며 쑥스러워 하다가도 이내 “여행 오기 전에 한국어 CD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으면서 연습했다”고 자랑했다. 수도 알마티 근교의 시골 마을 박박디에서 온 이들은 살면서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1937년 강제이주로 그곳에 정착한 고려인 300여 가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몇 남지 않은 그곳 고려인 중에서 한국 여행을 온 건 할머니들이 처음이다.

강 할머니는 “옆집 할머니도 오고 싶어 했는데 여권 문제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며 “한국에서 뭘 먹고 봤는지 정확하게 보고하라고 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큰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비행기로 5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오는 데는 8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새 부모님과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들은 “바쁘게 살았지”라고 나직이 말했다. ‘바쁘게’는 ‘힘들게’라는 뜻의 고려말이라고 한다. 안 할머니는 “강제이주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릴 적에는 거의 투쟁하듯이 살아야 했고, 산다는 게 그 자체로 목적이었다”며 “그래서 달리 한국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한국 생각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할머니들은 “(한국에 와보니) 한국 사람들도 우리랑 같더라”고 했다. 제주도 관광을 마친 뒤 탄 여객선에서 고스톱을 치는 중년 여성들을 봤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 뻔했다고 한다. 안 할머니는 “우리는 민화투를 치는데 고스톱은 규칙이 좀 더 어려운 것 같았다”며 아쉬워했다. 강 할머니가 한국어로 “어찌나 복잡하게 놀던지”라고 탄식하자 할머니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됐다.

한국 여행을 마친 소감을 묻자 허 할머니는 “다 좋았지, 다”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할머니들은 제주도 천지연폭포와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허 할머니는 “(카자흐스탄에) 돌아가면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도 얘기를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재연 기자 jay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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