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초된 유신, 평화헌법에 의지해 다시 서다

사가현이 주관하는 막말유신기념관은 극장형 체험관이다. 사진은 관람객들이 선조들의 높은 뜻에 공감하며 자신의 의지와 꿈을 나뭇잎 모양의 종이에 써서 매달아 놓은 풍경이다. 사무국의 이시이 마사히로 차장은 “올 3∼9월 142만명이 다녀갔으며 나뭇잎 메모는 타임캡슐에 담았다가 메이지유신 200주년이 되는 2068년 공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글 싣는 순서

(상) 메이지유신은 왕정복고
(중) 근대 동아시아 악연의 시작
(하) 메이지유신의 좌절과 戰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달려온 부국강병 외길의 끝은 패전이었다. 그것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폭 공격을 당한 참담한 패배였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자국민을 310만명이나 희생시키면서 메이지유신의 길은 1945년 좌초되고 말았다.

이카루스의 추락, 유신의 좌절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패전을 밀랍으로 붙인 날개가 떨어져 죽은 그리스신화 속 이카루스에 비유한다. “이카루스처럼 아시아로 팽창을 가능하도록 한 만능의 날개는 급조된 밀납으로 고정시킨 것에 불과했다”(‘메이지유신 150년을 생각한다’, 2017)는 것이다.

유신 전야에 나타난 개국과 양이가 본질적으론 같다고 보는 마치다 아키히로 고베외국어대 교수는 “개국은 당장 서구열강과 싸우면 패할 것이 분명하기에 무모한 양이를 버리는 선택일 뿐”(‘양이의 막말사’, 2010)이라고 말한다. 그는 개국을 ‘대(大)양이’, 과격 양이를 ‘소양이’로 구분했지만 내용적으로는 둘 다 외부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이라고 봤다. 유신의 좌절은 대·소 양이의 추락이며, 그것은 일본의 모든 대외방책이 무너졌음을 뜻한다.

유신을 회생시킨 평화헌법

메이지유신은 그러나 좌절로 끝나지는 않았다. 전후라는 새바람 속에서 회복의 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비록 점령군 주도로 벌어진 것이지만 메이지 이후 부풀어진 부(負)의 유산인 앙시앵레짐(구체제)은 일소됐다. 다만 새로 등장한 일본국 헌법에 따라 유신의 핵심인 왕정복고·입헌군주제는 천황대권(통치권·입법권·군통수권)이 박탈됐을 뿐 기존의 틀은 유지했다.

이로써 유신 이후 입헌군주제는 이어질 수 있었고 좌절됐던 유신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평화헌법이란 별명을 갖게 한 ‘전쟁포기·비무장’ 조항(헌법 9조)의 역할은 지난 70여년간 매우 중요했다. 과거 유신이 전쟁으로 일관됐다면 좌절된 유신은 평화를 키워드로 삼아 회생했다. 이와 더불어 지난 전쟁에서 2000만명을 희생시킨 데 대한 반성이 동반돼야 함은 당연하다.

위협받는 전후 평화국가 일본

전후 일본은 평화국가 유지에 노력했다. 미국은 이미 한국전쟁 때부터 9조를 포함한 평화헌법 개정을 요구했다. 예컨대 미국의 대일외교정책보고서로 잘 알려진 ‘아미티지 보고서’(1차 2000년, 2차 2007년, 3차 2012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평화헌법 개정이다. 그럼에도 일본 시민사회는 평화헌법을 고수했다.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장 융커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국헌법’(2005)에서 미국의 일본사학자 존 다우어 교수는 “9조만큼 분명한 일본의 전후 반성은 없다”고 지적한 바 있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 아베 신조 총리가 평화헌법 개정을 정권의 존립 목표로 삼고 있어 우려되는 면도 있다. 다만 일본 국민들의 헌법 개정 찬성 의견은 27%(반대 27%, NHK 올 4월 여론조사)에 불과하고 헌법 9조에 대한 긍정평가가 70%에 이르고 있어 개정은 쉽지 않을 터다. 중요한 것은 좌절된 유신이 ‘평화’를 키워드로 삼아 회생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틀을 무너뜨리려는 행보는 회생한 유신을 다시 죽임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다. 유신(維新)은 평화로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는 두 번 다시 훼손될 수는 없다.

규슈·야마구치=글·사진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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