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은유 연극, 평화는 끈질긴 만남으로 싹튼다는 메시지

오랜 시간 적이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이 맺은 평화협정의 이면을 통해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극 ‘오슬로’의 한 장면. 전환기를 맞은 현재의 남북 관계를 연상케 한다. 국립극단 제공


평화는 쉽지 않았다. 서로의 부모형제를 죽여 온 양측,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자들이 노르웨이 오슬로의 숲속 고성에 모인다. 화해를 위해 모였지만 선언문에 들어갈 단어 하나에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소리를 지르고, 종이를 집어던지기 일쑤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든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무려 일곱 차례. 인간적 유대가 깊어지는 만큼 평화의 바람도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한다.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해외 신작 ‘오슬로’가 지난 12일 아시아 초연으로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극작가 J T 로저스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 연극은 2016년 미국 뉴욕에서 초연된 이후 토니상 등 주요 상을 휩쓸며 반향을 일으켰다. 이성열 국립극단 예술 감독의 취임 후 첫 연출작으로도 관심을 모았다.

‘오슬로’는 이·팔 양측이 1993년 맺은 오슬로협정의 뒷얘기를 다룬다. 양측의 유혈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미국 주도의 평화 협상은 제자리걸음을 한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노르웨이의 한 부부, 사회과학연구소장 티에유(손상규)와 외무부 직원 모나(전미도)는 오슬로에 비밀 협상 테이블을 마련한다. 여기서 이·팔은 수십 년 분쟁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인다.

세계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25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이·팔 사이의 분쟁은 현재진행형이고 그 역사 또한 지난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지금, 이곳’의 관객들을 찾은 이유는 연극이 일종의 은유이고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남한과 북한이 평화를 향해 가는 과정과 이 이야기가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북 정상의 4·27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 관계가 전환기에 놓인 지금 ‘오슬로’는 ‘서울과 평양’으로 치환된다. 주목되는 건 이 연극이 담고 있는 평화에 대한 통찰이다.

평화로 가는 발걸음은 결국 사람에서 출발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비밀 협상 채널을 제안한 건 티에유·모나 부부다. 한 싱크탱크의 소장이자 외무부 직원일 뿐인 이들의 과감한 구상이 역사를 만든 것이다. 협정의 물꼬를 튼 것도 이·팔의 대표자가 아니다. 용기를 내 한걸음을 내디딘 양국의 실무진들이었다.

이들은 거듭되는 갈등에도 만남의 끈을 놓지 않았다. 평화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일곱 번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서로를 ‘괴물’로 여기던 이들을 ‘친구’로 바꿔낸다. 반목하던 인물들은 극 중반을 넘어서면 서로가 그어놨던 ‘레드라인’을 훌쩍 뛰어넘는다. 연극은 이처럼 끈질긴 만남과 신뢰 속에서 평화가 싹튼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이 화해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말한다.

연극은 장장 180분에 달한다. 하지만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속도감 있는 무대 연출과 갈등의 지점을 달리하며 이어지는 협상은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한편 중간중간에 놓인 재치 있는 대사와 몸짓은 극의 긴장을 이완하는 동시에 독특한 리듬감을 만든다. 손상규 전미도와 팔레스타인 재무장관 쿠리에 역을 맡은 김정호 등 배우들의 연기도 일품이다. 다만 극이 전달하는 정보량이 상당한 만큼 극 도입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듬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협정은 결국 이행되지 못했다. 분쟁은 여전하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에유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자.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보세요! 우리가 피와 공포와 증오를 모두 통과해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거라면,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겠어요?” 공연은 11월 4일까지.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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