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당시 웅번들은 맨바닥서 기술 축적 꾀했다”

시미즈 노리카즈 일본산업고고학회 이사장.
 
사쓰마번주의 별장 센강엔 부지에 있는 반사로(反射爐) 터.


산업고고학이란 분야가 있다. 과거 산업혁명시대 시설이 훼손되는 경우가 많아 연구와 보존을 위해 산업기술사, 사회경제사, 문화사 등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학문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산업고고학회 이사장 시미즈 노리카즈(70) 규슈국제대 명예교수를 만나 막말과 메이지 초기의 산업기술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2015년 7월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유네스코 등재 당시 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막말의 기술 수준은.

“기본적으로 당시는 농업중심사회였지만 부분적으로 상품경제체제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미 일부 웅번 중에는 공장제 수공업도 나타나고 있었는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맨바닥에서 기술 축적을 꾀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쇄국 중에도 네덜란드와 소통하고 있어 서구 문물을 꾸준히 수용했지 않았나.

“서구 근대과학문명이 난학(蘭學·네덜란드학)이란 이름으로 전수됐다. 하지만 아편전쟁의 충격은 웅번들의 각성을 촉발시켰고 무엇보다 강력한 함포 제작에 매달렸다. 그들에겐 철을 다루는 기술이 절실했다. 결국 주물, 제철, 압연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맨손으로 반사로(反射爐) 제작에 뛰어들었고 조슈, 히젠사가, 가고시마 등 웅번들이 성공했다. 고온에도 견디는 벽돌 등 반사로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의 자체 조달은 관련 분야 기술 축적 없이는 어려웠을 게다.”

-메이지일본산업혁명유산 유네스코 등재와 관련해 대상 시기를 1910년으로 제한한 것에 대해 식민지 강점 시기를 배제하기 위한 편법 아니냐는 의문이 있다.

“당초 산업혁명유산은 공업국가 일본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 추진해서 시한이 그리 된 것이다. 실제로 그 즈음에서야 야하타제철소, 미쓰미비조선소 등이 수익을 내기 시작했고 세계적 수준의 선박 제작이 가능하게 됐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산업유산 등재 설명에 그곳에서 강제노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당연하다. 산업유산 유네스코 등재 결정 당시 사토 구니 유네스코 주재 일본대사는 ‘강제동원된 징용자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밝혔으나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대응이다.”

산업유산과 징용자 문제와 관련해 시미즈 교수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있었던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데서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의 전후가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고쿠라·가고시마=조용래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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