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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개혁·혁명적 전환 불구 봉건적 성격 더 강하다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막말 기술 축적과 인재 육성에 열심이었다. 집성관을 만들어 방적기계를 들여놓고 매뉴팩추어를 직접 운영했다. 상고집성관 본관 모습이다.


구니타케 마사코 나가사키준신대 교수.


메이지유신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견학할 수 있도록 1992년 가고시마시가 문을 연 유신후루사토관. 요즘 연일 인파가 몰린다.


메이지유신의 성격에 대한 견해는 퍽 다양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공적인 역사적 변혁을 이룬 것이라는 의미에서 메이지유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다. 예컨대 2015년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 강연에서 “메이지 50주년 때의 총리는 야마구치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다케, 100주년 때는 사토 에이사쿠 총리였다. 내가 잘하면 150주년 때도 야마구치 출신이 총리를 맡게 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1968년 당시 사토 총리가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친동생이라는 점과 함께 자신도 야마구치 출신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부터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메이지유신 150주년 행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오사와 마우치 전 교토대 교수는 올 6월 잡지 ‘현대사상’ 특집호(‘메이지유신의 빛과 그림자-150년째의 물음’) 권두논문에서 정부의 일방적인 유신 예찬이 되레 일본인의 역사의식을 훼손하고 자신감을 잃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정부가 그동안 메이지유신 이후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일본의 근대가 마치 메이지유신으로부터 시작돼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아시아 태평양전쟁의 패전과 더불어 일본인들은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유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견해는 1920년대 일본 좌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본자본주의 논쟁’이다(노로 에이타로, ‘일본자본주의발달사’, 1927). 강좌파 학자들은 유신이 ‘신흥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은 시민혁명’이라고 주장한 반면 노농파(勞農派)들은 ‘일종의 절대왕정에 불과하다’며 대립했다.

이에 대해 시미즈 노리카즈 규슈국제대 명예교수는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의 아전인수식 자랑 섞인 견해를 경계하는 한편 유신에 대해서는 기존의 여러 주장을 종합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유신은 왕정복고(Restoration), 혁명(Revolution), 개혁(Reform)의 성격이 각각 상존하고 있다”고 본다. 기본 틀은 왕정복고라고 하겠지만 혁명적인 측면도 있고 개혁 과정의 성격을 갖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유신의 안착과 더불어 여러 제도가 시차를 두고 속속 추진됐으나 유신의 입헌제적 성격은 이전의 막번체제 하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혁명적인 전환이 적지 않다. 모든 국민을 교육의 수혜자로 삼은 교육제도, 천민제도 철폐도 기존 사농공상 프레임을 뛰어넘는 혁명적 시도다. 물론 천민제도 철폐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고 차별이 내재화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우에스키 사토시, ‘천황제와 부락차별’, 2008). 뿐만 아니라 이미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수공업 등 상품화폐경제에 대한 다양한 제도 개혁, 예컨대 중앙은행 출범, 조세제도 개혁 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구니타케 마사코 나가사키준신대 교수는 일본여성사 연구자의 관점에서 “메이지유신은 불행한 근대의 출발점”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인터뷰에서 “메이지유신의 움직임은 민중들의 내재적인 불만, 즉 억압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주로 하급무사라고는 하지만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외압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구니타케 교수는 여성의 참정권과 관련해 “주자학적인 세계관이 지배했던 막말에도 상인 가정에서는 ‘데릴사위제도’를 통해 사실상 여성 상속이 관행화됐는데 메이지정부는 그 정도도 따라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메이지민법의 경우 ‘남성 호주 중심의 가족제도(家制度)’를 근간으로 삼아 여성의 권위는 오히려 막말보다 후퇴했다”고 강조했다.

1890년 시행된 메이지제국헌법은 명백하게 봉건적 입헌군주제의 성격을 담고 있다. 우선 천황대권, 즉 통치권, 입법권, 군 통수권을 모두 천황이 쥐고 있었으며 국민은 군주의 지배 하에 놓인 ‘신민’에 불과했다. 신민은 어느 정도의 자유권은 인정됐으나 유사시에는 국민의 권리보다 천황의 명령이 우선되는 존재에 불과했다. 근대 민주주의 헌법 하의 국민은 기본적 인권이 영구히 보장되는 존재다. 메이지유신의 봉건성과 개혁적 근대성의 혼재는 이후의 입헌군주국 일본의 좌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담고 있었던 셈이다.

고쿠라·나가사키·가고시마=글·사진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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