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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하윤해] 한쪽에 힘이 쏠릴 때



외교 관계의 혁명적 전환은 지도자의 의지만으론 불가능하다. 참모의 헌신적인 보좌도 동반돼야 한다. 지금은 정면충돌하고 있지만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중국 관계에 극적인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통찰력과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추진력이 맞물린 결과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역할 분담도 ‘닉슨·키신저 콤비’에 밀리지 않는다. 문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와 서 원장의 고군분투가 남북 관계의 획기적인 개선과 더디긴 하지만 북한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이끌어냈다. 서 원장이 문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북한 비핵화 국면을 주도한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서 원장이 남북 대화는 물론 한·미 협상도 물밑에서 조율한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서 원장은 지난 7월 말 박선원 특보와 함께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과 대북 문제를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무 부처인 외교부를 건너뛰었다는 뒷말이 나왔다. 여권에서는 서 원장의 점수가 높다. 워싱턴을 찾았던 한 여당 의원은 서 원장 얘기가 나오자 “가장 적절한 인사가 가장 적절한 타임에 가장 적절한 위치에 있다”고 평했다. 그러나 한쪽에 지나치게 힘이 쏠리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상대방도 누가 실세인지쯤은 금방 눈치 챈다.

얼마 전 한국의 통일·외교부처의 수장이 각각 북한과 미국의 카운터파트로부터 면박을 당하는 일이 빚어졌다. 지난 5일 평양에서 열린 회담에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2∼3분 늦게 도착한 이유로 고장 난 시계를 들었다. 그러자 북한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은 “관념이 없으면 시계가 주인 닮아서 저렇게 된다 말이야”라고 대놓고 비꼬았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남북 군사합의서 내용과 관련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리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의 언행은 심각한 외교적 무례다. 그러나 이런 푸대접을 우리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워싱턴에서는 북한의 조평통과 미국의 국무부가 한국의 파트너들에 답답함을 느낀다는 얘기가 정설처럼 나돈다. 정보도 없고, 추진력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에서 정보와 추진력을 함께 갖춘 기관을 잘 알고 있다. 국정원의 독주는 상대방이 우리의 통일·외교 수장을 얕잡아보는 부작용을 낳았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관계자는 “폼페이오 장관의 바로 직전 직책이 중앙정보국(CIA) 국장이었기 때문에 국무부와 CIA의 유기적 협력이 이례적으로 잘되는 것 같다”며 “한국 외교부와 국정원이 미국 수준의 협조 체제를 구축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남북 정상회담도 올해 세 차례 열렸고,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열릴 조짐이다. 대화의 틀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 문재인정부의 북한 비핵화 접근법을 수정할 적기라는 생각이 든다. 서 원장이 이끄는 국정원은 전쟁 공포를 대화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언제까지 정보기관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정원 주도에서 벗어나 통일·외교·국방·정보기관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수립해야 할 때다. 국정원이 손을 떼라는 것이 아니라 협업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북·미의 스파이 기관도 비핵화 협상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같은 파워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정보기관은 보안이 생명이다. 이런 속성은 칸막이식 정보 독점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제는 문재인정부의 실세 인사가 통일·외교부처의 장관 중 하나라도 맡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부처에 힘이 실리고 북·미가 대놓고 장관을 무시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잘 나가다가 삐끗할 때도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계속 전면에 있으면 그 후폭풍도 문 대통령을 향할 것이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문 대통령에게 범퍼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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