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음식이야기] 한국 현대사의 밀

6·25 당시 구호식량 배급 풍경


우리 민족에게 6·25전쟁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폐허 속 한국인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실업에 내몰리며 굶주림에 허덕였다. 수출을 하려 해도 수출할 건더기가 없었다. 땅 속의 중석과 철광석 그리고 바닷속 수산물이 그 무렵 수출 품목의 전부였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미국은 한국의 시급한 기아 해결과 전쟁피해 복구를 위해 원조를 재개했다.

전쟁 중 미국 원조는 1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원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53년부터는 연간 2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 휴전 즈음인 1953년 7월에는 다음 해 한국경제 부흥비로 3억 달러를 책정한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다. 이듬해 7월에는 이승만 대통령 방미를 계기로 1955년도 원조 금액으로 7억 달러를 얻어냈다. 한 마디로 보릿고개를 버텨내지 못해 굶어 죽는 서민들을 살리기 위한 정부의 몸부림이었다.

미국은 원조를 농산물 등 잉여물자로 지원했다. 1955년 5월에 한·미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돼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미국은 밀(소맥)을 위주로 보리(대맥) 등을 보냈다. 당시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했으며 그 가운데 밀이 70%였다. 따라서 밀가루 값은 쌀값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 쌀 가격의 6분의 1 수준이었다. 이러니 없는 형편의 국민들로서는 거의 전적으로 밀가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 당시 한반도에 15개의 제분공장이 있었으나 전쟁 중 대부분 파괴돼 남한에 1952년 ‘대한제분’이 생기고, 1953년 ‘조선제분’이 시설을 복구함으로써 밀가루가 국내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 번창했던 게 국수를 뽑아내는 국수가게와 빵공장들이었다. 그나마 국수도 사 먹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배급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이때 원조물품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 제분, 제당, 방직산업이었다. 이른바 초창기 수입대체산업이었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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