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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걸음으로 다가오는 다랑논의 가을

경남 고성군 거류면 문암산 기슭에서 내려다본 송곡마을 ‘달팽이 다랑논’이 누렇게 익어가는 벼와 함께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가운데 산을 중심으로 말아 놓은 듯 층층이 이어진 논마다 풍성함이 배어난다.
 
이른 아침 공룡 발자국이 선명한 너럭바위에서 본 상족암.
 
왜구 방비를 위해 축조한 소을비포성의 성루와 성곽.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 고택 사이를 굽이치는 판석 담장.
 
파란색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바다를 품은 당동만 전경.


경남 고성의 양쪽 끝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서쪽은 자란만, 동쪽은 당동만이다. ‘공룡 발자국’과 상족암(床足巖) 등 고성의 대표 여행지를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 자란만이다. 하지만 천고마비의 계절 고성에서는 풍요로 일렁이는 바닷가 마을이 우선이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조각보를 이어놓은 것 같은 독특한 형태의 다랑논을 수놓고, 그 옆으로 파란 바다가 진하게 펼쳐져 있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가을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고성 땅의 풍요로움을 느끼려면 거류면으로 가야 한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특급 전망대’가 그곳에 있다. 당동만 뒤편에 우뚝 솟은 거류산(570m)과 이어지는 문암산(459m)이다.

출발 지점은 거류산 아래 장의사. 통영대전고속도로 동고성나들목에서 동쪽으로 1009번 도로를 타고 가면 이정표가 나온다. 부산 방향에서 국도를 이용하면 반대편에서 오를 수 있다. 약수터를 지나면 곧바로 나오는 다리를 건넌다. 이어 삼거리에서 왼쪽 ‘엄홍길 기념관’쪽으로 오르막을 오른다. 5분여 뒤 능선 위에 다시 삼거리가 나타난다. 산 능선을 따라 문암산으로 향한다. 이곳부터 숲이 더 우거지고 바위가 수시로 앞을 가로막는다. 10∼15분가량 오르면 정상 조금 아래 왼쪽으로 시야가 확 트인 넓은 바위가 보인다. 발아래 당동만 일대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통영대전고속도로 왼편으로 거류면 송곡마을의 다랑논이 보인다. ‘달팽이 다랑논’이다. 다랑논 가운데 산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말아 놓은 듯 얇게 층층이 이어진 논 모양이 달팽이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봄부터 농부의 시간이 쌓인 듯한 논마다 고개 숙인 벼 이삭이 가을을 부르고 있다. 좁지만 모나지 않은 논둑길 사이로 풍성함이 배어난다.

왼쪽으로 파란색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당동만이 이어진다. 방파제 사이로 출항하는 고깃배들이 고요한 물 위로 길게 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지고, 그 너머에는 굴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이 줄 맞춰 떠 있다. 그 바다 위로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알록달록한 조각보 같은 다랑논이 아기자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먼바다 쪽을 바라보면 어의도·가조도·칠전도가 아련히 보인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익어가는 가을 풍경이 수고를 보상해준다.

문암산을 거쳐 거류산에 오를 수 있다. 옛날 여염집 규수가 산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산이 걸어간다’고 소리쳤다. ‘걸어가던 산’이라는 뜻으로 ‘걸어산’으로 불리다 거류산이 됐다고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남해안의 절경과 벽방산, 구절산, 고성읍 시가지 및 고성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순신 장군 대첩지인 당항포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거류산은 ‘고성의 마터호른’으로 불린다. 스위스 알프스의 깎아지른 듯한 삼각형 모양 산을 닮았기 때문이다. 지형에 힘입어 정상 주위에 돌을 쌓아 만든 성이 있다. 2000여년 전 소가야 때 신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소가야가 신라에 합병되면서 폐성(廢城)됐던 산성의 자취는 현재 유적지로 복원돼 있다.

자란만으로 간다. 앞바다에 있는 자란도에서 얻은 이름이다. 자란만 초입에는 괴암섬과 누은섬·소치섬·대구섬 등이, 잔잔한 만 안쪽에는 자란도와 만아섬·밤섬·보리섬 등이 해안을 따라 보석처럼 박혀 있다.

자란만은 바다 너머로 뜨고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른 아침 통영 미륵산 쪽에서 떠오른 해는 둥근 품의 자란만을 주홍빛으로 수놓는다. 일몰도 황홀하다. 해가 사천 쪽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며 바다를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인다.

자란만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사천 쪽으로 가면 소을비포성(경남도 기념물 139호)을 만난다. 왜구 방비를 위해 고성만으로 돌출된 구릉 위에 돌을 쌓아 축조한 수군기지다. 둘레 200m, 높이 3m의 성벽과 성루 한 곳이 복원돼 있다.

이어 상족암 군립공원이 나온다. 상족암은 상다리를 닮은 바위로, 1억년 전 백악기 공룡들이 서식했던 곳이다. 5000여 족에 이르는 공룡 발자국이 ‘공룡 나라’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백명이 족히 앉아 쉴 만한 너럭바위에는 공룡의 발자국이 선명하다. 거대한 몸집의 공룡이 방금 지나간 듯하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종류의 공룡이 살아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지로 꼽힌다.

상족암에는 공룡의 흔적과 함께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파도와 바람이 깎아 만든 상족암 해안절벽은 층층 시루떡을 닮았다. 상족암 일대와 이웃한 제전마을 쪽에도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다. 제전마을에서 상족암을 거쳐 덕명마을로 이어지는 데크길을 걷는 것만으로 오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 수 있다.

상족암 바로 위에 고성공룡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중생대 초 처음 모습을 드러낸 뒤 약 1억6500만년 동안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공룡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여행메모

상족암 공룡 발자국은 썰물 때 관찰 가능
판석 담장이 아름다운 학동마을 한옥체험


경남 고성은 동서로 길쭉하게 펼쳐져 있다. 개별 목적지를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 목적지를 묶어 둘러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동쪽에는 당동만, 당항포 관광지 등이 있고 서쪽엔 상족암, 소을비포성, 자란만, 학동마을 등이 몰려 있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고성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통영대전고속도로로 갈아타면 된다. 대중교통은 서울남부시외버스터미널을 이용한다.

당동만 일대는 동고성나들목이 가깝다. 황리사거리에서 거류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된다. 상족암 군립공원이나 학동마을 쪽은 고성나들목으로 빠져 고성읍을 지나 33번 국도를 타고 진주 방면으로 가다 13번 국도와 77번 국도를 차례로 갈아탄 뒤 제전삼거리를 지나 1010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아름다운 옛 담장도 둘러볼 만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판석을 쌓고 황토를 덧대 만든 돌담이 고택 사이를 굽이쳐 돌아나간다. 공룡 발자국 관찰은 썰물 때 가는 것이 좋다. 밀물이 들면 발자국이 바닷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다.

숙박시설은 당항포와 상족암 군립공원 쪽에 많다. 당항포관광지펜션(055-670-4501)과 고성읍 신월리 프린스호텔(055-673-7477)은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굿스테이 업소다. 학동마을 최영덕 고가(055-673-6904)에선 한옥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내부 수리중인 경우가 많아 사전 확인이 필요하다.

고성읍 공룡시장 내 아우네식당(055-673-4747)은 물메기매운탕으로 이름났다. 예약이 필수이며 2인분 이상 주문해야 한다. 하이면 사곡3길 흙시루(055-832-8822)는 전어한정식 등 제철에 나는 재료로 밥상을 차린다. 된장찌개 등 토속적인 음식도 차려 낸다.

가리비 양식으로 유명한 자란만에서는 개미집(055-835-0775)이 알려졌다. 주로 찜으로 내지만, 가리비와 뿔소라와 낙지 등 싱싱한 해산물을 넣고 끓이는 해물탕도 맛깔나다.

고성(경남)=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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