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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소통하다

광주 광산구 임곡동 월봉서원을 드론으로 찍은 모습. 가운데 빙월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월봉서원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현재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양림동에 자리한 조선 말기의 주택인 이장우가옥.
 
광주 양림동 펭귄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펭귄시계점.
 
건물 벽에 조성된 양림동 안내도.
 
양림동 초입의 카페이자 전시공간인 ‘양림148’.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다. 모두가 풍요롭고 정겨운 한가위를 위해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에 이런 곳이 있다. 소중한 문화 자산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현재와 소통하고 호흡하는 월봉서원과 근대와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이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서원’하면 으레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월봉서원은 다르다. ‘호남선비의 뿌리’ 고봉 기대승(1527∼1572)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는 서원이지만 요즘 젊은이들과도 호흡하고 있다.

400여년 전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교류를 하던 선비들이 있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과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 고봉이다. ‘월봉 로맨스’. 26세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13년 동안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근간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고, 학문적·인간적 우정을 나눴다.

고봉은 조선 중기에 성리학자로 우뚝 선 인물이다. 12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20세 때 향시 진사과에 2등으로 합격해 성균관에서 유학했다. 1558년 32세에 장원급제해 정계에 진출했다.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지만,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1558년 무오년 한양에서 처음 만났다. 퇴계는 쉰여덟의 노인이었고, 고봉은 서른둘의 패기만만한 젊은이였다. 퇴계는 고봉이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편지로 답한다. 편지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새파란 나이의 젊은 선비와 당대 최고의 석학이 서로를 예우하고 존중하며 ‘불통(不通)의 고집’ 대신 ‘소통과 교류’를 실천했다.

광주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 백우산 기슭에 자리 잡은 월봉서원을 찾아간다. 먼저 행주 기(奇)씨 집성촌으로 고봉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너브실마을로 들어선다. 너브실마을은 ‘너른 계곡’이라는 이름답게 안으로 들어설수록 그 품을 넓힌다. 황톳빛 돌담을 따라가면 월봉서원이 나온다. 1654년 효종이 ‘월봉’이란 사액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가 1941년 빙월당을 시작으로 1981년까지 수십년 세월에 걸쳐 복원됐다.

단단하고 반듯한 화강암 돌담을 두른 ‘망천문’이 입구다. 너브실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황룡강)을 바라보는 문’이다. 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 안 깊숙이 돌기단 위에 자리 잡은 빙월당(氷月堂)이 정면으로 보인다. 월봉서원의 강당으로, 1938년 전남 지역 유림들이 세웠다. 양쪽으로 기숙사인 동재(명성재)·서재(존성재), 자료를 보관하는 부속 건물 장판각까지 당당하게 거느리고 있다.

‘월봉서원’이라 쓰인 현판 양쪽에 ‘빙월당’ ‘충의당’ 현판이 걸려 있다. 오른쪽 방에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이라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가난할수록 즐거움이 더한다’는 뜻으로 퇴계 이황이 보낸 편지 중 한 구절이라 한다.

월봉서원은 현재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다. 조선 선비 일상을 체험하는 ‘선비의 하루’, 공연과 토크쇼를 결합한 ‘살롱 드 월봉’, 월봉유랑단과 함께하는 서원관광축제 ‘월봉유랑’, 고봉과 퇴계의 교류를 극화한 ‘월봉 로맨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조선시대에서 나와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아름답고 따뜻한 공간으로 찾아간다. 양촌과 유림을 합쳐 마을 이름을 얻은 광주 양림동이다. 버드나무 숲으로 덮여있는 마을로, 광주 기독교 선교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양림동 골목여행은 관광안내소에서 시작한다. 마을을 대표하는 옛날 집은 최승효가옥과 이장우가옥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최승효가옥은 사유지여서 집 안을 볼 수 없어 아쉽다. 대문 앞에 있는 게시물로 내부 사정을 상상해 본다.

인근에 이장우가옥이 있다. 이장우 선생은 동강유치원, 동신 중·고등학교, 동신 여중·고등학교, 동강대학, 동신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다. 1899년 안채와 대문간을 건축했고 1959년 이장우 선생이 매입해 사랑채, 행랑채, 곳간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안채 앞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고 안채 앞에는 펌프가, 장독대 앞에는 수도가 있다. 집은 개방했지만 장독대 앞 작은 철문은 잠겨져 있다.

이어 소심당조아라기념관. 조아라 여사는 ‘광주의 어머니’라 불린 민주화·사회운동가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1936년 신사참배를 거부한 수피아여학교의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일제에 검거돼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켰고 1951년에는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성빈여사를 세웠다.

사직공원 아래에 유진벨선교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 100년 전 선교사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유진 벨의 한국 이름은 ‘배유지’. 수피아여학교, 숭일학교, 정명학교, 영흥학교를 설립했다. 일본강점기 때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추방되기도 하고 광주 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도 지었다.

세브란스병원의 원장이었던 올리버 어비슨의 아들로 농업전문 선교사인 고든 어비슨을 기리는 어비슨기념관과 이웃해 광주양림교회가 있고 담장 하나 사이로 오웬기념각이 있다. 오웬은 유진 벨과 함께 1904년에 광주 선교를 시작했지만 1909년 폐렴에 걸려 순교자가 됐다. 건물은 1914년 가족과 친지들의 후원금으로 지어졌다.

양림동 여행길의 종착역에는 펭귄 마을이 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곳으로, 최근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마을에 들어서면 골목길 정취와 풍경들을 퍼즐 맞추기를 하듯 하나하나 불러 모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동네 담벼락은 하루에 두 번만 맞는 고장 난 시계와 낡은 시계, 너덜너덜해진 플라스틱 모기채, 이가 빠진 사발, 귀퉁이가 찌그러진 양은 밥상, 고무신 등 1970∼80년대에 쓰던 온갖 잡동사니가 걸려 있는 ‘기억창고’다. 녹색 칠이 여기저기 벗겨진 철제 대문과 대문 옆 장독대, 낡은 슬레이트, 절구통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행메모

너브실마을 ‘이안당’ 茶문화 체험·숙박
남광주시장 돼지국밥·순대국밥 ‘깊은 맛’


월봉서원은 호남고속도로 장성나들목으로 나와 함평 가는 24번 국도를 타고 가다 황룡사거리에서 좌회전해 816번 지방도로로 갈아탄다. 황룡강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다 왼쪽으로 월봉서원 이정표가 나오면 좌회전한다.

너브실마을 ‘이안당(怡安堂)’에 전통문화카페 ‘다시(茶時)카페’가 있다. 선비문화를 대표하는 차(茶) 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다. 6명 이상 단체 예약을 하면 너브실마을에서 기른 식재료로 만든 남도 밥상 차림까지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이안당에는 10∼12명이 묵을 수 있는 숙박공간이 있고 동재와 서재에도 20명이 묶을 수 있다. 예약한 단체만 이용할 수 있다.

광주에 도착하면 양림동역사문화마을은 지하철로 다녀올 수 있다. 남광주역에서 양림동까지 도보 10분 거리. 양림동에 작은 맛집들이 많다. 양림동에서 남광주역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남광주시장은 돼지국밥집이 많다. 돼지뼈를 진하게 우려내고 아삭한 콩나물을 듬뿍 넣은 순대국밥은 돼지 냄새 없이 깊은 맛을 낸다. 어비슨기념관 2층에 있는 카페는 저렴하고 편하고 넓은 공간과 팀 회의실이 마련돼 있다.

잠잘 곳으로 우일선 선교사 사택 앞에 위치한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062-654-0976)가 좋다. 붉은 벽돌과 나무가 어울린 안팎으로 예쁜 숙소로, 양림산 아래 울창한 숲이 거실 통유리창으로 보인다.

광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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