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아이디어·표현의 독창성 다 중요… 이번 사건 통해 아이디어로 중심 이동”

‘조영남 대작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구본진 변호사. 이병주 기자
 
조영남이 콜라주 해서 보낸 작품을 ‘조수’가 회화로 변형해 제공한 작품(왼쪽 사진)과 조씨가 여기에 자신의 해석을 가해서 변형한 작품(오른쪽 사진). 꽃처럼 표현된 화투짝에 붓 터치가 더해졌고, 화병의 카드 무늬가 삭제됐으며, 바닥 테이블의 크기도 변형이 됐다. 구본진 변호사 제공


1907년, 프랑스의 마르셀 뒤샹은 공산품인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았다. 60년대 미국 작가 솔 르윗의 경우 지시서만 주고 조수로 하여금 제작하게 한 작품이 1200점이 넘었다. 이후 현대미술에서는 아이디어가 점점 중요해졌다. 그렇다면 미술 제작 관련 시비를 심판하는 한국의 법리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화투 그림으로 유명한 가수 조영남(73)의 ‘그림 대작 사건’은 이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다. 최근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가 선고됐다. 이 선고의 의미와 한계를 승소를 이끌어낸 구본진 변호사(법무법인 로플렉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짚어봤다. 그를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에서 만났다.

조영남은 2011년 9월부터 3년여 동안 송모씨 등 ‘대작 화가’가 그린 그림에 경미한 덧칠 작업을 한 후 17명에게 21점을 팔아 1억5300여만원을 챙긴 혐의(사기)로 2016년 기소됐다. 문제의 작품들은 화투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최대 쟁점은 작가를 누구로 보느냐였다. 1심 재판부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외부로 표출하는 창작 표현 작업도 회화의 중요한 요소”라며 송씨 등이 단순한 ‘조수'가 아닌 ‘독자적 작가'라고 판단했다. 검찰은 조영남이 처음에는 화투를 잘라서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제작하다가 컬렉터들이 회화를 선호하는 데 따라 20여년간 작품 활동을 해온 송씨 등에게 작업을 시키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조영남을 작가로 봤다. 구 변호사는 “송씨 등은 조영남이 콜라주와 회화를 섞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라고 지시를 하면 작품 이미지를 컴퓨터로 출력해서 먹지에 대고 똑같이 그렸다”고 했다. 또 1심이 ‘경미한’ 덧칠 작업만 했다고 판단한 것과 달리, 조영남이 선을 추가하고 색을 변경하며 배경을 바꾸는 등 새로운 해석을 했다고 강조했다. 송씨 등이 한 일은 작가적 창작이 아니라 보조적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조수를 쓴다는 사실의 고지 여부도 쟁점이다.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등 팝아트 작가들은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 이들은 조수의 존재를 공공연히 밝혔지만, 조영남은 숨겼다는 것이 검찰 측 주장이다. 구 변호사는 “내가 그리나, 남(조수)이 그리나 똑같지 뭐” 같은 발언을 통해 조수 사용을 충분히 고지했다고 반박했다.

현행 저작권법은 아이디어와 표현을 이분법으로 나눠 표현에 있어서만 저작권을 인정한다. 구 변호사의 변론 역시 조영남이 선과 색, 배경을 바꾸는 등 추가로 ‘표현’한 것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선 아이디어와 표현의 독창성 둘 다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저작권 판단에서 표현보다 아이디어로 무게 중심을 옮긴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술의 개념이 새롭게 확장되고 있다. 사법부의 인식 폭이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영국 등에서는 이분법적 경계가 무너지면서 아이디어를 보호해주는 판례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는 그림을 취미로 그리는 가수가 유명세를 이용해 돈을 번다는 미술계의 반감이 깔려 있다. 전국의 209개 미술단체가 판결에 반발해 즉각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구 변호사는 “미술계에도 표절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만큼 이번 대작 사건이 최종 무죄로 결론이 나면 전체 작가들의 창작 아이디어가 보호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는 “한국 사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아이디어가 보호받아야 아이폰을 만든 애플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