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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천국 한국… 직접 키운 토종은 없다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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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불황에도 명품 초호황
부가가치 일반상품 1000배지만 韓 ‘값 싸고 질 좋은 상품’ 올인… 럭셔리 브랜드 개발 신경 못 써
갤럭시 S·제네시스 제외하면 해외서 통하는 韓 명품 전무
백화점들 토종 브랜드 육성보다외국산 수입품 팔기에 급급


백화점 1층 매장은 으레 해외 명품 브랜드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루이비통, 샤넬, 카르티에, 보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인 유로모니터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명품 시장 규모는 대략 14조5000억원으로 추산된다. 미국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8위권이다. 세계 15위권에 불과한 전체 내수시장 규모에 비하면 명품 구매력은 선진국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 셈이다. 신세계·롯데·현대 등 백화점 3사의 명품 VIP 상품 매출액 규모도 전체 매출액의 40%를 차지할 정도다.

한국은 명품 브랜드 리트머스시험지

선진국 시장조사 기관들 사이에서 “한국은 유럽 명품 브랜드들의 리트머스시험지 같은 나라”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유명 명품 브랜드들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면 자국 시장을 제외하곤 가장 먼저 한국에 출시한다. 한국에서 이 제품이 성공하면 중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명품 가운데 의류 화장품 가방 주얼리 시계 등을 가리지 않고 토종 브랜드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게 과언이 아니다. 패션계로만 한정하면 최고급 럭셔리 브랜드들뿐 아니라 가성비 좋은 대중 브랜드들조차 다수가 외국산이다.

미국 투자금융사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돼 온 전 세계적 불황기에도 명품 브랜드들은 세계 곳곳에서 날개가 돋친 듯 팔려나갔다. 대중 브랜드들이 명멸(明滅)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루이비통 가방과 샤넬 화장품, 에르메스 핸드백과 스카프들은 초호황기를 계속해 왔다. 단 하나의 제품으로 일반 상품 1000개에 버금가는 값을 받으니 부가가치는 하늘을 찌를 기세다.

우리나라는 수출이 전체 경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다. 하나의 상품을 수출하기 위해 온갖 국제무역의 악조건을 뚫어야 나라 살림이 돌아가는 구조다. 상품 개발을 위해 각 기업이 아이디어를 다 짜내고, 온 역량을 투입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이를 통해 일자리가 생겨나고 기업에 고용된 근로자들이 내수시장에서 물건을 사야 유통산업과 서비스산업이 돌아간다.

‘토종 명품’ 전무, 한국 경제 현주소

이런 상황에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하나같이 럭셔리 브랜드 상품을 개발하기보다 1970, 80년대 고도성장기에 유행했던 ‘값 싸고 질 좋은 상품’ 만들기에만 열을 올린다. 해외에 더 많이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명품 육성에는 너무나 인색한 게 관행이자 문화가 돼 버렸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스마트폰 갤럭시S 시리즈,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등 몇몇을 제외하면 외국에서 고부가가치에 팔리는 럭셔리 브랜드는 전무하다.

왜 그럴까.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압축·고도성장을 이룬 한국 자본주의의 현주소라고 얘기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암흑기를 거쳐 1960년대 비로소 시작된 현대적 자본주의 경제가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해오면서 물건 하나에도 역사와 스토리, 자신의 경험을 담아내야 성공할 수 있는 럭셔리 브랜드 개발에는 아예 신경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게 습관이 돼 21세기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한 지금에도 기업들은 여전히 ‘값 싸고 질 좋은 게 제일 잘 팔린다’고 여기는 기업 풍토를 갖게 됐다. 하나라도 비싸게 팔기 위해 쏟는 노력을 대량생산과 가격 인하를 통해 대량 수출로 상쇄하려 한다.

동덕여대 정재우 교수(패션디자인학)는 “유럽 외에 20세기 전후로 자본주의가 흥한 국가는 대부분 명품 브랜드들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서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조차 엄밀히 말하면 고도성장 자본주의 국가이고, 이들 나라에도 유럽산 명품만큼 최고가에 팔리는 럭셔리 상품 브랜드는 없다”고 했다. 19세기 초반부터 부를 축적한 서유럽 국가들의 부자들은 명품을 제조하는 장인들을 육성해 자신들만의 가치를 온 몸에 치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화에도 성공할 수 있었지만 20세기 이후 발전한 국가들에선 사치품을 향유할 만한 소비층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스타일리시+첨단’ 한국산 이미지 살려라

한국산 제품의 질은 이미 최고… 국내에도 훌륭한 장인 많아
미래 위해 투자할 대형 기업 절실 “준럭셔리 제품 개발부터” 지적도


기형적 유통산업 구조가 최대 원인

경제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명품 브랜드가 아예 탄생할 수 없는 음지(陰地)가 한국이라는 진단은 아니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새로운 세계 시장 공략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만큼 토종 명품 브랜드는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이를 가로막는 ‘한국적’ 산업 상황과 시장 관행이 가장 큰 문제다. 정 교수는 “젊은 장인들이 탄생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한국의 유통산업 구조와 기업 관행이 이들을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원인”이라고 했다. 패션평론가 유재부씨도 “명품이 되려면 반드시 브랜드 인지도와 역사성,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패션디자이너들은 상품을 만들어 먹고살기도 힘든 실정”이라며 “유통 구조를 장악한 백화점들이 토종 패션 브랜드들을 육성하기보다 외국산 수입제품 팔기에만 급급하다”고 지적했다.

고(高)마진이 보장되는 외국 명품 브랜드를 수입해 파는 게 당장은 수익 실현에 더 유리할지 모르지만 전도유망한 국내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토종 브랜드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수출까지 노린다면 더 큰 부가가치가 보장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한국산 명품의 전략=첨단·스타일·감성

한 전문가는 “이미 한국산(産) 매력에 흠뻑 빠진 중국 소비자층을 생각하더라도 국산 명품의 필요성은 더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한 해 해외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23조원어치 이상 사는 중국 고급 소비자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가성비 상품’ 대량유통·대량수출 전략보다는 최고급 상품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산 명품 개발을 위한 전략은 어떠해야 할까. 정 교수는 “뭐든 빨리빨리 바꾸는 국내 소비자층에 맞춰 한국 브랜드들은 어느 나라 브랜드들보다 새로운 상품, 새로운 디자인을 채택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며 “‘한국은 첨단’이라는 이미지, 스타일리시하다는 세계인의 시선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산 상품의 질은 이미 각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도 무방하다”며 “이를 이미지로 포장하고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스토리를 갖추는 게 필요한데 이런 측면이 가장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결국 첨단 기술, 첨단 기능성을 갖추면서도 세련되고 오래 두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 이에 걸맞게 글로벌 브랜드를 덧입히고 이 브랜드의 지속성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유재부씨는 “훌륭한 장인은 충분히 국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에게 자본의 규모성, 브랜드의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 대형 유통기업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백화점 기업들이 국산 브랜드들 위탁판매에만 급급할 게 아니라 될성부른 장인을 발굴해 국내 브랜드를 스스로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다른 전문가는 곧바로 세계적 명품 브랜드로 진입하려는 전략보다는 ‘준(準)럭셔리’ 브랜드를 개발하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의 글로벌 상품 시장은 모든 상품이 럭셔리-준럭셔리-가성비-SPA(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Brand·대량생산 제조 유통 단일기업 상품) 등으로 세밀화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가운데 부가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준럭셔리 이상의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선 원가만 낮추는 식의 대량생산 방식을 피하고 원산지를 ‘메이드 인 코리아’로 한정해야 한다. 한국만의 감성과 디자인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오직 창의성으로만 승부하는 장인과 디자이너들이 이런 산업 생태계를 견뎌내기 위해선 지금 당장의 이윤 창출보다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대기업, 대형 자본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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