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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수고가 낙과로 ‘우수수’… 빚더미만 남았다

지난달 29일 강원도 원주의 한 과수원에 집중 호우 때 떨어진 설익은 배 여러 개가 땅에 나뒹굴고 있다.
 
지난달 31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의 한 비닐하우스에 메마른 돌갓이 진흙더미와 뒤섞여 있다. 지난달 29일 파주에 300㎜ 가까운 비가 내려 이 일대 비닐하우스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


폐허된 파주 비닐하우스
64동 중 60동 물에 잠겨… 추석용 계약 재배도 다 망쳐

낙과 뒹구는 원주 과수원
혹한·비바람에 텅 빈 가지 30여년 만에 최악의 흉작

추석인데… 소비자도 울상
알 작은 사과값 작년 두 배


수확의 계절 가을을 앞두고 농가와 과수원마다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겨울 추위가 봄까지 이어진데다 여름 기록적인 폭염 탓에 작황이 좋다는 농가를 찾기 힘들다. 최근 예상치 못한 폭우까지 겹치며 여러 농가들이 자식같이 키운 농작물을 지키지 못했다. 소출이 줄면서 가격이 치솟아 추석을 앞두고 식탁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추석에 맞춰 키웠는데…”

지난달 31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안모(54)씨의 비닐하우스 안.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안씨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하우스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맥없이 늘어진 돌갓 이파리가 진흙더미 속에 나뒹굴었다. 한 뼘 정도 자란 열무는 노랗게 썩어 바닥에 눌어붙었다. 줄지어선 10여개의 비닐하우스 모두 같은 풍경이었다. 이틀 전 폭우를 쏟아낸 하늘은 늦여름 햇볕을 따갑게 내리쬈다. 안씨는 “이대로 두면 사흘 뒤엔 모두 썩어 이파리 하나도 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경기도 파주에는 호우경보가 발령되며 300㎜ 가까운 ‘물폭탄’이 쏟아졌고 오전부터 내린 비는 순식간에 불어나 논밭을 덮쳤다. 파평면에서 열무, 얼갈이배추, 돌갓 등을 재배하던 안씨네 비닐하우스는 64동 중 60동이 침수됐다. 다른 비닐하우스 농가 5곳도 피해가 극심했다. 안씨는 주변 비닐하우스의 90% 이상이 물에 잠겼다고 보고 있다. 그는 “허벅지 높이까지 물이 차올랐다”며 “작물도 문제였지만 비닐하우스가 무너질 수도 있어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흙탕물을 뒤집어 쓴 작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잿빛 ‘폐허’로 변했다. 일부라도 성한 작물이 남아 있길 바랐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땅이 완전히 마르기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안씨는 “지금은 흙이 질어 기계가 들어갈 수 없다”며 “밭을 정리하고 다시 파종하는 데 20일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이번 비는 해당 지역에 수문을 새로 만들고 난 뒤 처음 내린 폭우였다. 안씨 등 침수 피해 농민들은 자연재해에 더해 ‘인재’(人災)까지 겹쳤다고 지적했다. 농가에서 하천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수문이 제때 열리지 않아 침수 피해가 더 커졌다는 주장이다.

현재 수문은 자동화 작업이 완료되지 않아 필요할 때 수동으로 열고 닫아야 한다. 안씨는 “과거에는 이 정도로 많은 비가 와도 낮은 지대에 있는 비닐하우스 20% 정도만 침수됐다”며 “수문이 농가에 물을 가두는 역할을 했다. 비가 그치고 하천 수위가 내려간 시점부터 빨리 수문을 열었다면 이 정도로 많은 비닐하우스가 침수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에 8㎏ 박스 400개를 납품하던 안씨의 사무실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직원도 없이 박스 포장지만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안씨는 “추석 대목이 아예 없어져 버렸다”며 “추석용으로 계약 재배한 작물들도 제대로 주지 못하게 돼 걱정이 크다”고 한숨지었다.

냉해와 폭염으로 망친 과수 농가

“농사꾼이 농사를 못 지은 게 자랑도 아니고…. 너무 창피해요.” 올해 쉰넷의 ‘농사꾼’인 A씨는 엉망이 된 과수원을 보여주며 연신 얼굴을 붉혔다. 지난달 29일 아침 강원도 원주 A씨의 과수원은 전날 밤 난데없이 쏟아진 폭우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후덥지근한 온도에 거무죽죽 얼룩이 진 배나무 잎사귀가 축축 늘어졌다. 지난겨울 영하 20도 가까운 혹한과 올여름 40도를 웃돈 기록적인 폭염을 거치면서 배나무는 열매를 거의 맺지 못했다. 나무에는 양손에 겨우 꼽을 정도의 열매만 달려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새 한 마리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새는 비바람에 떨어진 설익은 열매를 반쯤 쪼아 먹다 날아갔다. 배는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개수만큼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벌레 때문에 벌써부터 생긴 낙엽이 과수원 바닥에 수북이 쌓여 발에 차였다. 추석 연휴를 겨우 한 달도 안 남긴 날이었다. 원주에서 30여년 배 농사만 지었다는 A씨는 “올해는 전례 없는 흉작(凶作) 중에 흉작”이라고 혀를 찼다.

평년 같으면 추석을 앞두고 배나무 하나에서 플라스틱 박스 아홉 개를 채울 열매 정도는 수확돼야 한다. A씨는 “올해는 박스 하나도 못 채우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고 했다. 지난겨울 겪은 냉해(冷害)가 열매 나올 구멍을 막아버렸고, 이를 버틴 나무도 여름의 폭염 때문에 생긴 충해(蟲害)를 이겨내지 못했다. A씨는 “박스에 담을 열매가 없으니 수확에 필요한 자재비는 덜 들겠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A씨가 남편과 지금껏 일군 과수원은 9900㎡(약 3000평) 남짓이다. 평년 매출은 5000만원 정도다. 그나마 이것저것 비용을 따지면 별로 남는 게 없지만, 그래도 부부는 과수원에서 흘린 땀으로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뒷바라지 했다. 하지만 올해는 매출이 10분의1로 쪼그라들어 빚만 한 뭉텅이 짊어지게 생겼다고 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상금이나 보험으로는 생계조차 벅차다. 생활비를 미리부터 마련하려 부부는 이날도 마을 인근 다른 일터에 품을 팔았다.

같은 마을의 다른 배 과수원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통상 한해 중 최대 판매철인 추석을 거의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입을 모았다. 원주의 다른 주요 특산물인 복숭아 과수원 몇몇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확 시기 맞은 태풍 때문에 낙과(落果) 피해까지 생겼다. A씨는 “올해 특히 마을 전체적으로 과일 작황이 다 안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시장엔 알이 작은 사과 등장

산지(産地)의 피해는 빠르게 시장에 도달했다. 2일 찾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의 도소매 상인들은 농작물 소출이 적어지고 상품이 부실해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했다. A상회를 운영 중인 이모씨는 “사과는 알이 작은 것만 나와 대체로 가격이 올랐다”며 “10㎏에 8만원에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3만∼4만원 수준) 보다 배 이상 뛴 가격이다.

B상회에서는 배추 3통에 3만원을 불렀다. 역시 지난해(3통에 7000∼8000원)의 4배다. 상회 주인 김모씨는 “물건을 들이던 대부분 하우스가 이번 집중 호우 때 물에 잠겨 공급량이 크게 줄었다”고 했다.

다른 곳도 상황은 비슷했다. 최근 서울 송파구 가락동 도매시장에서 판매된 사과(10㎏)는 최상급인 ‘특품’이 5만2000원, 한 단계 아래인 ‘상품’은 4만9027원을 기록했다. 지난달 18일 기준 특품과 상품은 각각 3만7182원, 2만9908원이었다. 열흘 만에 사과값이 1만∼2만원 오른 것이다. 사과값 상승세를 반영해 최근 유통업계는 사과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귤을 넣은 추석 선물세트가 등장하기도 했다.

대형마트도 다르지 않았다. 서울 서대문구의 대형마트를 찾은 이혜련(60·여)씨는 “명절 상에 올릴 나물 가격도 많이 올랐다. 대부분의 요리에 들어가는 파와 당근 등의 가격은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싸졌다”며 “배추랑 무의 가격도 올라 예년만큼 김장을 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의 대형마트를 찾은 강미경(58·여)씨는 “지난해 대비 모든 채소 가격이 전반적으로 많이 올랐다”며 “특히 불과 얼마 전까지 한단에 2000∼3000원 하던 시금치가 9000원에 육박하는 걸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번 명절에는 시금치를 빼고 잡채를 만들어야 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파주·원주=글·사진

박상은 조효석 기자,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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