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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했던 공중전화의 추억, 변신 시도는 아직도 ‘뚜뚜뚜’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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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폭염을 피해 호주 멜버른으로 여행을 갔었다. 북반구의 여름 대신 남반구의 겨울을 찾아간 셈이다. 보통 해외여행을 하면 스마트폰에 갈아 끼울 현지 유심(U-SIM)칩을 한국에서 준비해 가는데 그땐 현지에서 샀다. 숙박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려면 먼저 호스트(집주인)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에어비앤비는 숙소가 대강 어느 동네에 있는지만 알려준다. 정확한 위치는 호스트에게 확인해 직접 열쇠를 받아야 한다. 호스트는 미국 여행을 떠나며 폴이라는 친구에게 집 관리를 맡겨둔 상태였다. 전화번호는 폴의 것이었다. 당시 계획은 ‘공항 입국장을 나가자마자 유심칩을 산다→폴에게 전화한다→그가 알려준 대로 숙소까지 간다→열쇠를 받아 내 집처럼 쓴다’였다. 별거 아닌 이 계획은 1번에서부터 틀어졌다.

현지 유심칩을 끼운 휴대폰은 30분이 넘도록 먹통이었다. 이런 적이 없었다. 점원은 “전화가 활성화되려면 4시간까지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밤 9시였다. 이대로 밤을 새워야 할 수도 있단 말인가. 상황도 모른 채 연락만 기다리고 있을 폴 생각에 더 조바심이 났다. 아는 동네까지라도 가며 휴대폰이 터지기를 바라기로 했다. 공항을 나서자 휴대폰이 터진 게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렸다. 버스정류장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공중전화가 아니었다면 조금 과장해 국제미아가 됐을지 모른다. 폰은 다음 날 오후에야 터졌고, 숙소가 있는 동네엔 공중전화가 없었다. 공중전화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느껴지기는 육군훈련소에서 수신자 부담으로 첫 통화를 한 뒤 처음이었다. 폴은 차를 끌고 공중전화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DDD와 전화카드 한 장

공중전화는 아직도 우리나라 곳곳의 길거리에 서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공중전화가 있느냐”고 물을 정도다. 아예 공중전화를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저마다 휴대폰이 있으니 찾을 일이 없다. 휴대폰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급히 전화해야 할 때도 공중전화를 찾기보다 남의 휴대폰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평소 이용하지 않으니 멜버른에서처럼 다급한 상황에서도 선뜻 떠올리지 못한다. 언젠가부터 코앞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투명사물’이 돼버린 공중전화. 하지만 한때는 지금의 휴대폰만큼 긴요하고, 애틋한 연락수단이었다.

공중전화의 전성기를 언급하려면 먼저 1980년대로 가야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더뎠던 공중전화 보급은 82년 첫 국산 시내외 겸용 공중전화가 등장하며 차츰 속도를 낸다. DDD(Direct Distance Dialing·장거리자동전화)라는 약자로 알려진 공중전화다. 색상이 기존 빨간색이나 노란색에서 은색으로 바뀌었고 동전 잔량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종전까지 시외 통화가 가능한 공중전화는 77년 도입한 일본제 조립품이었다. 80년대 중반까지 공중전화는 동전으로만 이용할 수 있었다. 가수 김혜림의 89년 데뷔 앨범 타이틀곡 ‘디디디(DDD)’를 통해 그 동전의 무게와 공중전화의 세대적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일부를 들어볼까. ‘그대와 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기에/전화 다이얼에 맞춰 난 몰래 그대를 부르네/속삭이듯 마음을 끄는 다정한 그 목소리/언제 들어봐도 왠지 두 눈엔 이슬만 맺히네/더 이상 이제 나는 기다릴 수가 없어요/마지막 동전 하나 손끝에서 떠나면/디디디 디디디 혼자서 너무나 외로워/디디디 디디디 가슴만 태우는 그대여.’

공중전화 이용량은 MS(Magnetic Stripe·자기 띠)카드식 공중전화가 86년 도입되면서 더욱 급증한다. 그해 아시안게임과 2년 뒤 열릴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개발한 국내 최초 카드식 전화였다. 동전을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전화카드 한 장만 있으면 공중전화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제전화까지 가능해진 MS카드식 공중전화는 도입 4년 만에 사용량이 126배 늘었고, 전화카드는 필수품이 됐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전화카드가 가진 정서적 의미를 노래패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1994년)만큼 절절하게 전하는 노래도 드물다. 80년 1만3000대 수준이었던 전국 공중전화 수는 기능 개선, 편의성 제고와 함께 90년 11만6000대로 급증한다. 90년대 공중전화는 결제 방식을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변신했다. 동전과 IC(Integrated Circuit·집적회로)카드뿐만 아니라 신용카드까지 쓸 수 있는 공중전화가 95년 등장했고, 2년 뒤에는 IC카드 전용 공중전화가 도입됐다.

공중전화에 깃든 추억들

80, 90년대 로맨스를 이야기하면서 공중전화를 빼놓긴 어렵다. 공중전화 부스는 당장 만날 수 없는 연인과 남몰래 속삭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누군가가 불현듯 보고 싶을 때 동네로 찾아가 “지금 너희 집 앞”이라며 불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별을 통보받은 이들은 상대를 놓아주지 못할 때 공중전화 수화기에 매달렸다. 이제는 중소기업 부장이 된 이모(48)씨의 20여년 전 연애담을 들어보자. “밤에 여자친구한테 연락할 땐 공중전화를 썼죠. 집 전화를 쓰면 가족이 들을 수 있으니 산책한다고 나가는 식이죠. 여자친구도 부모님이 먼저 받으면 곤란하니까 우리끼리 시간을 정했죠. 걸면 바로 받을 수 있게. 여자친구는 간혹 부모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냥 친구라고 둘러댔대요. 종종 여자친구 집 근처까지 가서 전화를 하기도 했는데 그 사람이 나오지 못해도 서로 가까이서 이야기한다는 기분에 통화가 더 즐거웠어요.” 그 시절에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사랑이 이뤄지기도, 부서지기도 했다.

공중전화가 7080세대만의 추억거리인 것만은 아니다. 공중전화는 휴대폰이 대중화하기 직전인 90년대 말 ‘삐삐’(무선호출기)와 함께 절정기를 누렸다. 당시 많은 중·고교생이 삐삐로 연락이 오면 쉬는 시간에 공중전화로 달려가 음성메시지를 듣고 단말기 창에 뜬 번호로 답장격인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이들에게도 공중전화는 친숙하다. 휴대전화가 보급된 2000년대 들어서도 유심칩을 자유롭게 갈아 끼울 수 있는 스마트폰이 대중화할 때까지는 해외에 나가면 국내로의 첫 안부전화는 거의 공중전화로 걸었다. 회사원 김모(33·여)씨는 “일본 어학연수 시절에 국제전화카드를 편의점에서 사서 공중전화로 가족이랑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일본어 학교 기숙사 면접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봤다”고 했다. 지금도 군부대에 있는 청년들은 대부분 공중전화로 안부를 전한다.

멸종 아닌 멸종

99년 운영 대수 15만3000대를 찍은 공중전화는 휴대전화 대중화가 이뤄진 2000년대 들어 빠르게 내리막을 걷는다. 세계적 추세다. 국내에서는 2007년 교통카드 공중전화 도입에 이어 2009년 군부대 영상공중전화 설치를 끝으로 공중전화의 변신은 사실상 끝이 났다. 스마트폰 등장과 맞물려 있다. 공중전화와 부스를 어떻게든 활용해보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지만, 아직 대중의 호응은 미미하다. 2016년 9월 미래창조과학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당시 공중전화 6만6000여대 중 65.9%가 최근 3개월간 이용 실적이 1만원을 밑돌았다. 현금인출기 등을 결합한 멀티(다용도) 부스나 위급상황 시 피신용으로 쓸 수 있는 안심 부스, 전기차 충전 부스처럼 활용성을 높인 공중전화는 전체의 3.9%에 그쳤다. 같은 해 환경부가 공중전화 부스 9곳에 전기차 급속충전기를 설치하고 매년 20곳 이상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진행 속도는 매우 더디다. 현재 전기차 충전소로 활용 중인 공중전화 부스는 15곳에 불과하다. 주차 문제로 확대가 어려운 탓이다.

현재 공중전화 이용자는 군인이나 한국으로 여행을 온 외국인 정도지만 이마저 줄고 있다. 국방부는 병사들이 일과 후 휴대폰을 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시범 실시 중이다. 정부는 운영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공중전화 운영 대수를 2020년까지 4만대로 줄일 예정이다. 올해 7월 말 기준 전국 공중전화는 5만3000대 정도다. 신규 제작은 2009년 중단됐다. KT링커스 관계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편적 통신 서비스와 비상통신용으로 필요한 만큼 공중전화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며 “철거되는 공중전화와 부스는 대부분 폐기하고 쓸 만한 건 예비용으로 비축했다가 기존 전화나 부스 교체용으로 재활용한다”고 설명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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