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종합

찾았다! 사이버 베프, 온라인 서클 전성시대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사진=게티이미지


23년째 서울 광화문 근처 회사로 출근하는 샐러리맨 A씨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홍대앞’으로 달려간다. 직장동료보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친구들은 대학원 재학 시절 PC통신 하이텔 동호회를 통해 만났다. 한결같이 취미는 ‘이상한’ 음악 듣기다. 25년 전인 1993년 하이텔 ‘언더그라운드뮤직동호회’에 가입한 그는 중학생 때부터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을 들어 왔다. 전 세계 판매량을 합쳐도 10만장이 될까 말까 한 인디밴드와 싱어송라이터들의 음반을 수집하고 듣기를 반복해 온 ‘마니아’였다.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시절도, 대학원을 다닐 때도 A씨는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음악을 듣는 이들을 주변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동호회를 발견해 가입해 보니 ‘딱 비슷한’ 동류(同類) 30여명을 알게 된 것이다. PC통신을 통해 만난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홍대앞에서 만나 서로의 음악 듣기를 나눴다. 이른바 ‘음반 콘서트’를 통해 각자 소개하고 싶은 희귀 음악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LP 레코드와 CD를 합쳐 1만장을 가진 직장인 선배, 돈만 벌면 음반을 사는 명문대 물리학과 대학원생,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음악 듣기를 포기하지 못한 여대생, 번듯한 금융회사에 다니다 사표를 던지고 전위적인 퍼포먼스 카페를 차린 전직 회사원, 음악이 좋아 레코드 가게를 차린 아가씨, 음악 때문에 방송사 PD 생활을 게을리하는 아저씨…. 지역과 나이, 학연과 지연을 완전히 초월한 사람들이 어떤 친구보다 친한 사이가 됐다. 어떤 이는 동호회에 들고 나서 인생을 바꾸기도 했다. 인디음악계를 선도하는 레코드레이블을 만들어 성공한 친구였다. A씨와 친구들이 모이는 곳은 바로 이 인디레이블 건물이다. 만나면 커피 한잔, 맥주 한잔 앞에 놓고 밤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운다. “내가 20년 전에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 받는다고 그랬잖아.” “그 말 한 사람이 형이었어? 절대 아닌 것 같은데.”

B씨는 40대 초반에 뒤늦게 시작한 골프에 폭 빠져 있다. 비싼 돈 들여 주말 라운딩을 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골프는 ‘인생 스포츠’다. 스마트폰을 켜면 가입된 골프 동호회 앱을 누르고 하나하나 어떻게 스윙하는지, 고칠 게 뭔지 찾아 실행해 본다. 한 달에 한 번 동호회 라운딩에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지난달에는 서울 등 수도권과 영남, 호남의 중간지대인 충청권 어느 골프장에서 150여명이 모여 라운딩을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도 아이디나 닉네임으로 익숙해 금방 친구가 된다. 근처에 살아 자주 보던 회원들은 이미 절친 사이다.

C씨는 영어로 된 소설책과 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번역해 공유하는 모바일 서클 멤버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영미권 국가에서 보낸 그는 번역가들이 출간한 번안문학 서적을 읽다가 이 서클에 가입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왜 이 문장을 이렇게 번역해서 잘못된 뜻을 전하는지. 시 번역은 정말 더 형편없었고요. 그냥 직역이라 시어들이 함축하고 은유하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질 않아요.”

이 서클엔 수천개의 게시물이 떠 있지만 원칙 몇 가지가 존재한다. 게시물을 모아 절대 출판할 수 없다는 규칙이다. “여러 명이 소설 한 권을 나눠 조금씩 각자 이해한 대로 번역해 게시물을 올리는데 그걸 출간해서 누군가 수익을 독점할 순 없잖아요.” 또 하나의 규칙은 “내 것만이 맞다”고 우기지 않기다. 서로 텍스트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공유하자는 게 서클의 취지인 만큼 비난과 비판을 자제하자는 것이다. C씨는 “취미의 유니크함, 정보의 개방성, 전문적 지식의 공유, 게시물의 비영리화는 아마도 모든 인터넷 동호회의 동일한 목표일 것”이라고 전했다.

바야흐로 ‘온라인 서클 전성시대’다. 가까운 동네, 함께 다닌 학교 등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전통적인 친구관계는 학연·지연을 넘어선 지 오래다. 남몰래 가슴속에 감춰뒀던 꿈과 취미, 하고 싶은 일과 동경의 대상은 이제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쉽게 사람들을 뭉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서로 동일한 대상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동경하는 다중적·전면적 인간관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스포츠와 영화, 팬카페 같은 평범한 공통 관심사뿐 아니라 특이한 희귀 음악, 희귀 취미를 가진 이들이 사이버 세계를 통해 쉽게 서로를 발견하고 공유하며 ‘특별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됐다. 이를 통해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정보·비평 능력을 가진 아마추어 마니아들이 생겨난다. 취미와 동경의 대상 등은 더욱 세분화되고, 이에 따라 모바일·인터넷 동호회 역시 촘촘한 그물망처럼 점점 더 점증한다.

인터넷 카페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카카오의 다음카페는 올해 현재 카페 수 1000만개를 넘어섰다. 사용자는 연인원 2000여만명으로 집계될 정도다. 네이버 카페 역시 이 정도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명이 여러 개 인터넷 카페에 동시 가입해 활동하는 것을 감안해 보더라도 전체 국민 5명 중 2명 이상이 인터넷 카페 회원으로 활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이들 포털 서비스 업체의 설명이다.

2010년대 스마트폰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급증하면서 애플리케이션 서비스를 시작한 네이버밴드는 글로벌 다운로드 수가 8500만회를 넘어섰다. 전체 밴드 수는 네이버 측이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다양한 주제에 걸친 동호회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나라에서 온라인 동호회 시대를 연 것은 ‘한국통신 하이텔’이었다. 당시 공기업이던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991년 12월 9일 온라인 PC통신 서비스 업체로 출범시킨 하이텔은 1992년 5월부터 유료 회원 서비스를 시작하며 각종 온라인 동호회를 개설했다. 한때 하이텔에는 5000여개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모뎀을 이용한 느린 통신 속도에 대한 사용자 불만이 많았다. 1999년 이후 인터넷 시대가 본격 도래하면서 자연스레 하이텔 동호회는 사라지게 됐고, 이후 무제한의 온라인 동호회가 인터넷을 통해 발전하게 됐다.

정보통신 전문가와 미래학자들은 이 같은 현상을 “20세기의 엘리트 주도형 사회의 해체”라고 진단하고 있다. 특출한 능력과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만이 정보를 생산하고 독점하며 이를 통해 지식과 권력을 전유하던 전통적·수직적 사회구조·인간관계는 존재할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생태계처럼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온라인 인간관계’와 모바일 정보 공유가 새로운 수평적 의사소통과 ‘아마추어 전문가’를 양산한다는 것이다.

한 학자는 “우리나라는 온라인과 모바일을 통한 인간관계·네트워크 형성의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고 했다.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모바일 인프라가 훌륭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사이버 감수성’ 수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1990년대 정보고속도로의 전국화가 실현돼 어느 곳에서나 값싸고 빠른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고, 30년에 가까운 인터넷 사용의 일상화가 사람들의 사이버 감수성을 한껏 높여놨다고 했다.

다른 학자는 “PC통신 시대와 인터넷 시대를 거치며 첨단 IT(정보통신) 기술을 쉽게 일상생활에 도입한 한국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온라인 문명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인다”면서 “이런 개방성이 한국만의 독특한 동호회 문화, 새로운 사이버 인간관계 형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