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中 역사의 부침 따라 몸값 달라진 피아노의 운명


 
중국의 신예 피아니스트 뉴뉴가 최근 중국 폴리그룹이 인수하려는 세계적 피아노 제작사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 서 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악기는 때로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상징한다. 혼란스럽고 헤게모니 대결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그 상징성은 더욱 강렬해진다. 서울 한복판 세종문화회관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시민회관이 화재로 전소된 자리에 세워진 세종문화회관은 개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을 자랑으로 내세웠다. 독일의 칼 슈케사가 설계한 이 파이프오르간이 ‘동양 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제작 당시 ‘일본 NHK홀 오르간보다 하나라도 더 커야 한다’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 때문이었다. 결국 세종의 오르간은 NHK의 오르간보다 손 건반이 하나 많은 6개짜리가 설치돼 제왕의 자리를 차지했다.

미국의 피아니스트 겸 작가인 스튜어트 아이자코프는 피아노 역사를 바꾼 가장 큰 정치적 이변은 단연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꼽았다. 그 중심에는 문화혁명 기간(1966∼76년)이 존재한다. 이 시기 중국에 있던 악기와 그 악기를 다루던 음악가들은 희비가 엇갈렸다. 홍위병이 외치던 4구(구사상·구문화·구풍속·구습관) 타파의 구호 앞에서 전통음악과 악기는 청산해야 할 과거의 잔재였고, 서양음악은 타도해야 할 사대주의 사상의 증거로 몰렸다. 이 기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은 ‘황하’, ‘홍등기’, ‘해항’ 등 사회주의 혁명의 모범으로 인정받은 8편뿐이었다.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지나간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 인민 대중의 음악이 훨씬 위대하다”라는 마오쩌둥의 외침 아래 서양 고전음악을 연주하던 음악가들은 줄줄이 숙청을 당했고, 당시 중국 내 클래식 음악교육의 메카였던 상하이 음악원은 10년 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악기들은 집이며 학교에 들이닥친 홍위병들에 의해 사정없이 부서졌다. 바이올린 같은 작은 악기들은 그나마 숨길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던 피아노는 이 시기 땔감으로 가장 많이 사용됐다. 1958년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던 중국 피아니스트 류치쿵은 문화혁명 기간 중 투옥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다. 여덟 살 때 이미 베이징 피아노 신동으로 인정받던 주 샤오메이(전 파리 음악원 교수)는 문화혁명 중 수용소에 들어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전사’로 재교육을 받은 다음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문화혁명 기간 중 어린 시절을 보낸 또 다른 피아니스트 공샹동은 소리가 나지 않게 피아노 줄에 헝겊을 싸서 남몰래 연습을 했다고 훗날 고백했다. 54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참가를 위해 아들 부총을 폴란드로 유학을 보낸 중국의 유명한 번역가 겸 음악평론가인 부뢰는 문화혁명 기간 중 반혁명분자로 몰렸다. 그는 영국에 망명한 아들의 안전을 위하여 66년 아내와 함께 자살을 선택했다.

13억 인구의 중국이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그럴듯한 클래식 음악가를 배출하지 못한 이유는 이런 문화혁명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2000년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쇼팽 국제 콩쿠르가 중국 충칭 출신의 윤디리를 역대 최연소이자 15년 만의 우승자로 낙점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이후 랑랑, 유자 왕, 그리고 가장 최근 혜성처럼 등장한 뉴뉴에 이르기까지 현재 전 세계 클래식 음악계를 주름잡는 젊은 중국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본토 출신으로 포스트 문화혁명 세대를 부모로 두고 있다. 경제력을 포함한 중국의 막강한 국력은 이들 세대를 국가 차원에서 전방위로 지원하고 있다. 2013년 한국의 삼익악기가 인수에 실패한 세계적인 피아노 브랜드 스타인웨이 사(社) 매입에 최근 중국의 국유기업인 폴리그룹이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도 이런 지원 사격의 일부다. 중국의 거대 자본과 정치력이 가담하면서, 음악계는 개인의 음악성을 넘어 본격적인 국력 경쟁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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