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익 블루칩 고려자기… 日 골동상들의 ‘독점 품목’

‘고려청자 광(狂)’으로 알려진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청자 수집 취미는 이왕가박물관 설립을 촉발시킨 주요 동기로 지목된다. 사진은 1908년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구입 최고가로 산 ‘청자상감포도동자무늬표주박형주자승반’(950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10년대 이왕가박물관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08년 조선자기 구입 최고가인 ‘장흥고명분청사기인화문대접’(100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진 왼쪽부터 고려자기 역대 최고가로 1930년 구입한 ‘청자상감퇴화풀꽃무늬표주박형주자승반’(3000원), 조선자기 역대 최고가로 1939년 매입한 ‘분청사기철화풀꽃무늬병’(1200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고려자기는 고려 최고의 미(美)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무덤 속 부장품으로만 존재하며 잊힌 예술이 됐다. 그랬던 고려자기는 언제부터 미술품이 됐고, 누가 그 시장을 만들어갔을까.

국민일보는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소장품(총 2573점) 목록을 단독 입수해 그 내용을 분석했다.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은 해방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돼 관리되고 있다. 이왕가박물관은 일제의 조선통감부 시절인 1909년 11월 창덕궁에 개관했다. 처음엔 제실(帝室)박물관으로 불렸으나 한일합병 이후 ‘이왕가(李王家)’로 명칭이 격하됐다.

박물관은 개관 전인 1908년부터 소장품을 수집했다. 고려 고분이 도굴돼 도자기, 금속 등이 시중에서 암거래되는데 따른 것이다.

납품 1호 골동상인은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다. 그는 1908년 1월 고려자기 15점을 판매했다. 그해 최고 매입가를 기록한 ‘청자상감포도동자무늬표주박형주자승반’(950원)도 그가 납품한 것이다.

백신 제조업자였던 곤도는 1906년 서울에 최초로 고려자기 골동상점을 낸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인들은 도굴품인 고려자기를 대놓고 거래했다. 1906년에는 고려자기 경매 시장도 생겨났다. 도굴된 도자기들이 상자째 개성에서 경성으로 보내졌다. 경매에선 상자 다섯 개씩 한 조로 10∼15원에 팔렸다. 1913∼17년 공립보통학교 교사 봉급이 20원 내외였던 시절이다. 무덤 속에서 꺼내진 고려청자가 이왕가박물관에 납품되면서 1908년에 이미 교사 몇 년 치 월급을 줘야 살 수 있는 고가 예술품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만큼 고려자기는 ‘노다지 장사’였다.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납품 골동상은 모두 129명인데, 상위 20위가 모두 일본인이었다. 특히 상위 10위가 전체 물량의 73.8%(1899점)를 차지했다. 전체 목록에서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는 23∼24명이다. 납품 물량은 전체의 0.2%가 안됐고, 1점 납품에 그치는 이도 15명이나 됐다. 이들 대부분은 고가의 고려자기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싼 중국자기와 조선자기를 파는데 그쳤다.

고려자기 첫 납품 한국인은 1912년에야 2명 등장한다. ‘강(姜)’이라는 성씨만 기록된 이와 이창호(李昌浩)였다. 이창호는 이때 ‘경오(庚午)’ 간지가 적힌 청자대접을 납품한 것을 기점으로 1915년까지 주자(注子) 병(甁) 완(?) 등 고려자기 10점을 팔았다. 이를 포함해 조선자기 등 총 14점을 납품해 한국인 최대 물량을 기록했지만, 전체 순위는 23위에 불과했다. 최고가격도 15원이라 수백원대 고려청자를 납품한 일본인에 비하면 엄청난 열세였다.

무엇이 일본인 골동상의 독무대로 만들었을까. 우선 일본에는 이미 1870∼80년대에 서양인들의 동양 도자기 취미에 따른 도자기 수집 열풍이 불어 닥쳤다. 이 무렵에는 일본자기와 중국자기가 고가의 시장을 형성했다. 일본 골동상인들은 개항 이후 조선에서 막 거래의 싹이 트기 시작한 고려청자가 막대한 차익 실현이 가능한 고수익 투자 상품이라는 걸 선학습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왕가박물관 관리층이 일본인이라 민족적 동질감에 의한 유착 가능성을 들 수 있다. 이왕가박물관은 대한제국 궁내부가 설립했지만 실질적 책임자는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이왕가를 관리·통제하던 이왕직(李王職) 차관 고미야 미호마스(小宮三保松)였다. 실무도 일본인이 맡았다. 고미야는 일본인 골동상점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전한다. 세 번째는 가격 장벽이다. 고려자기 가격은 초기에 이상 급등함으로써 영세한 한국인 골동상인들이 취급하기엔 힘에 부쳤다. 1908년 조선자기 최고가는 100원이었다. 1908년 최고 가격끼리만 비교하면 고려자기는 조선자기보다 9.5배 비쌌다.

그러다 조선자기는 1920년대 들어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한 일본인 지식인들에 의해 애호되면서 시장에서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고려자기는 1930년 매입한 ‘청자상감퇴화풀꽃무늬표주박형주자승반(보물 1930호)’이 3000원으로 해방 전 이왕가박물관 구입 최고가였다. 조선자기는 1939년 1200원에 매입한 ‘분청사기철화풀꽃무늬병’이 최고가를 기록했다.

결론적으로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수집 목록은 고려자기 시장이 국권을 상실해가던 사이, 일본인이 도굴하고 거래를 독과점하며 쥐락펴락한 그들만의 리그였음을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가 최근 발간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35집에 실린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수집 목록에 대한 고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