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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법상 성폭행 열에 아홉 무죄… 주목 받는 ‘비동의간음죄’





현행법, 심각한 폭행 등 있어야 인정…피해자에게 “왜 저항 안했나” 따져
동의 안하면 처벌하는 법 만들어야
여성단체들 18일 항의 시위 예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법원이 현행법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비동의간음죄 도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하거나 ‘명시적 동의가 없으면 강간으로 보는 규칙’(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이 없는 한국에선 피해자 진술이 사실이어도 안 전 지사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원의 언급이 불씨를 댕겼다.

한국의 성폭력 범죄 수사와 재판이 피의자 중심적이라는 기존의 비판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번 논의 자체가 성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논란을 두고 “터질 게 터진 것”이라고 평가한다. 폭행·협박의 여부로 강간을 규정하는 국내법은 국제사회 권고 기준에 못 미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벨기에는 이미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성관계는 수단·관계의 정도에 관계없이 강간죄를 구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도 2016년 법 개정 이후 ‘피해자의 표현된 의사’를 중점에 두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3월 한국에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점에 두도록 시정하라”고 재차 권고했지만 진전이 없었다. 지난 4월 법무부가 “비동의간음죄 신설을 전향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게 전부다.

이 때문에 피해를 보고도 이를 알리지 못하는 피해자가 많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15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된 상담 사례 124건 중 가해자의 심각한 수준의 폭행·협박이나 피해자의 강한 저항 또는 도망친 행위가 존재하는 경우는 15건에 그쳤다. 현행법을 엄격히 적용했을 때 처벌 가능한 경우는 12.1%에 불과한 셈이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달부터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례 20여건을 제보받아 분석한 결과도 비슷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강하게 저항하거나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성학계는 한국도 비동의간음죄를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가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법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성범죄에 대한 인식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며 “이번 논란은 한국 사회와 법조계에 거스를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도 “기존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며 “‘왜 합의라고 생각했느냐’가 아닌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를 묻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법보다는 인식의 문제라는 의견도 많다. 김태명 전북대 로스쿨 교수는 “한국은 아직도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명백한 성관계 강요 증거’ ‘주변인들의 증언’ 등에만 의지하고 있다”며 “안 전 지사 사건의 경우 현행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는 시각이 많은데 ‘현행법상 한계’라고 한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창현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비동의간음죄는 피해자 진술에 지나치게 좌지우지되는 부작용이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송혜미 법률사무소 현율 변호사는 “현행 법 체계가 피해자에게 성폭력에 대한 입증 책임을 지나치게 지우는 건 맞다”면서도 “비동의간음죄의 경우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신설되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성단체들은 안 전 지사의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를 예고했다.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오는 25일로 예정됐던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못살겠다 박살내자’ 집회를 1주일 앞당겨 18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이재연 안규영 기자 jay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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