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종합

수요집회 6년 봉사 신호성씨 “너무 늦게 참여해 미안한 마음뿐”

신호성씨(오른쪽)가 15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에서 시민들에게 팸플릿을 나눠주고 있다. 최현규 기자


광복절인 15일 시위 참가자 수천명이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으로 몰려들자 자원봉사자 신호성(49)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제134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 현장에서 신씨는 땡볕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50m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배지와 희망저금통이 비치된 판매대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6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요시위에 참가해 왔다는 그는 근처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너무 늦게 시작해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신씨가 처음 수요시위에 참가한 건 2012년 봄이다. 홈스쿨링을 받던 중학생 아들이 집에서 놀기만 하자 무작정 끌고 나와 시위 장소를 찾았다. 그에겐 대학생이던 1992년 수요시위에 참가하러 갔다가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있다. 신씨는 “당시 할머니 몇 분이랑 실무자들이 경찰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안 났다”며 “결국 주변만 맴돌다 돌아갔다”고 회상했다.

못내 주저했던 기억은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20년이 흘러 아들 손을 잡고 다시 수요시위를 찾았을 때 할머니들에게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왔으니까 됐다”는 김복동 할머니의 짤막한 대답은 마음을 후벼 팠다.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준 길원옥 할머니의 손길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신씨는 “경남 거창이 고향인데 경상도에는 일본에 끌려갔다 돌아온 어르신이 꽤 있다”며 “한국에 돌아와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사셨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부터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 뒤늦게 나선 것”이라고 털어놨다.

수요시위를 이끄는 정의기억연대 활동가들은 신씨를 두고 “우리보다 더 열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명의 시위 참가자로 시작한 신씨는 이제 판매대 운영을 총괄한다. “잔돈으로 줄 동전이 부족한데 어떡해야 하느냐” “희망저금통은 그냥 나눠줘도 되느냐” 등 봉사자들의 질문은 모두 그를 향한다. 일찍부터 주식 투자를 업으로 삼은 그는 “매주 수요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비워둔다”고 했다. 아들 현규(19)씨도 시간이 될 때마다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

300차례 넘게 시위에 참가한 신씨지만 요새는 걱정이 많다. 수요시위에서 할머니들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거의 매주 이곳을 찾던 김복동·길원옥 할머니도 건강이 악화된 후로는 나눔의 집에 남는 날이 많아졌다.

신씨는 “이제 모든 할머니가 90세를 넘겼고,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분이 많다”며 “하루빨리 이분들의 소망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재연 기자 jaylee@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