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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 철로가 가로지르는 임청각… 노블레스 오블리주 안동 여행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 등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경북 안동시 임청각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일제가 독립정신의 맥을 끊기 위해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부설한 중앙선 철로 위를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분홍색 꽃을 피운 배롱나무 옆 군자정에 붙은 사랑채와 우물이 보인다.
 
임하면 천전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복원된 가산서당.
 
풍산읍 오미리 학암고택 앞에 세워진 김재봉 선생의 어록비.
 
오미리 출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광복운동기념공원’. 촛불 모양의 탑이 우뚝하다.




경북 안동시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릴 만큼 독립운동의 도화선이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인구 17만명에 국가서훈 독립유공자가 357명이다.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으로 꼽히는 1894년 갑오의병의 발상지다. 일본에 주권을 강탈당하자 곡기를 끊고 순국한 선비가 10명이고,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한 선비들도 부지기수다.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집안도 많다. 안동 선비들에게 독립운동은 의(義)를 행하는 유교정신의 실천이었다.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의 생가다.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6년 5월 이곳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의 도덕적 의무)를 상징하는 공간’이라 칭찬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임청각은 석주 선생을 비롯해 아들 준형(1875∼1942), 손자 병화(1906∼1952) 등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유서 깊은 집이다. 석주 선생의 동생(이상동·이봉희), 조카(이형국·이운형·이광민), 당숙(이승화)을 포함해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사람만 9명이나 된다.

석주 선생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이듬해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망명했다.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이 돼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1932년 만주 땅에서 순국했다. 그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선생의 유해는 광복 45년 만인 1990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가 1996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내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석주 선생의 유고(遺稿)를 안고 귀국한 아들 준형은 일제의 끈질긴 고문 및 협박과 변절을 요구받자, 1942년 아버지 문집인 ‘석주유고(石洲遺稿)’ 정리를 마친 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임청각은 1519년에 지어졌을 때 99칸이었으나 지금은 60여 칸으로 줄어 들었다. 임청각이 항일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자 일제는 1930년대 후반 중앙선 철도 부설을 핑계로 이 집 전체를 없애려 했다. 하지만 여론에 밀려 행랑채 등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마당으로 중앙선 철길을 놓았다. 현재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君子亭), 정침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남아 있다.

사랑채 앞에 ‘3명의 정승이 난다’는 속설을 지닌 우물이 있다. 석주 선생과 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낙파 유후조 2명이 나왔다. 한 명이 더 나올 것이라는 기대로 신혼부부들의 관심이 많다고 한다.

동쪽 담장의 샛문을 열면 군자정이 나온다. 정면 기단 위에 누상주와 누하주로 구성된 건물이 단정하게 올라 있다. 누마루에 올라서면 벽에 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의병장 고경명, 백사 윤훤, 파서 이집두 등의 시판이 걸려 있다. 특히 석주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며 남긴 시 ‘去國吟’(거국음)과 이준형의 피가 고인 유서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군자정 옆 연못을 지나면 사당이다. 사당에 조상의 위패가 없다. 석주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면서 ‘나라를 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조상의 신주를 땅속에 묻었기 때문이다.

‘임청각 3대 종부’ 고(故) 허은(1907∼1997) 여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올해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경북 구미 출신인 허 여사는 석주 선생의 손자며느리로, 1915년 서간도로 망명한 뒤 32년 귀국할 때까지 서로군정서 회의를 지원하는 등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안동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내앞(천전)마을이다. 1907년 석주 선생과 류인식, 김동삼 등이 힘을 모아 협동학교를 설립했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폐교된 협동학교 터 바로 아래에 한옥 형태를 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한다.

전시관 외부에 조성된 ‘1000人의 길’은 안동·경북 지역 독립유공자 1000인의 이름을 새긴 산책로다. 길 끝에는 안동광복지사기념비가 있고, 협동학교 터에 교사(校舍)로 쓰인 가산서당이 복원돼 있다.

독립기념관 인근 백하구려(경북도기념물 137호)의 사랑채도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였다.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이 1885년에 지은 가옥이다. 김대락은 이 가옥을 비롯한 전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 건립 자금에 보탰다. 인근에 의성 김씨 종택(보물 450호) 등 한옥이 고풍스럽게 남아 있다.

안동 독립운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풍산읍 오미리(五美里)다. 풍산 김씨 500년 세거지로, 독립운동가만 24명을 배출했다. 마을에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여럿이다. 학암고택(鶴巖古宅)은 19세기 학암 김중휴가 지은 집으로, 솟을대문 앞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옥고를 치른 항일구국지사 김재봉 선생의 어록비가 서 있다. ‘조선 독립을 목적하고’라는 글귀가 칼날처럼 새겨져 있다. 영감댁, 허백당, 삼벽당 등이 주변에 있다.

삼벽당 서쪽 언덕에 ‘광복운동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한가운데 촛불 모양의 탑이 서 있고, 오미리 출신 독립운동가의 이름들이 탑을 둘러싸고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짓고 단식으로 순절한 김순흠,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장관 김응섭,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만주에서 일본 총영사를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 등이 대표적이다.

‘광야’의 저항시인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도 만나보자. 육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손이다. 도산서원을 지나 도산면 원천리에 닿으면 ‘청포도’ 시비와 시인의 흉상을 만난다. 육사의 생가는 옮겨졌지만 이육사문학관에서 시인의 생애를 볼 수 있다.

여행메모

괴정삼거리 좌회전 후 924번 지방도 ‘오미리’
알싸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의 안동식혜


승용차를 이용해 안동으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서안동나들목을 이용하면 편하다. 안동 시내 방향으로 우회전해 경서로를 따라가다 법흥육거리에 닿으면 인근에 임청각이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이곳에서 경동로를 따라 약 13㎞ 이동해 내앞(천전)마을로 가면 된다. 오미마을은 서안동나들목에서 예천 방향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괴정삼거리에서 좌회전해 924번 지방도를 탄다. 가다 보면 오른쪽에 오미1리 오미동이라 새겨진 커다란 표지석이 있다.

안동에는 호텔, 자연휴양림, 명품고택, 게스트하우스, 민박 등 묵을 곳이 다양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하회마을 인근에 민박집이 많다. 임청각에서 고택체험이 가능하다.

안동찜닭, 안동식혜, 안동간고등어, 헛제삿밥 등이 대표 음식이다. 안동찜닭은 삶은 닭에 온갖 채소와 당면을 넣고 양념을 섞은 뒤 졸인 것으로, 달착지근하면서도 매콤하다. 안동시청 인근 구시장에 있는 찜닭골목에서 즐길 수 있다.

안동식혜는 쌀로 고슬고슬하게 지은 고두밥과 엿기름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일반 식혜와 같지만, 고춧가루·무·생강 등을 넣어 발효시킨 안동지방의 전통 음식이다. 알싸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과 아삭하게 씹히는 무와 탱글탱글한 밥알이 독특한 식감을 만들어 낸다.

안동=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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