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완식의 우리말 새기기] 미역(멱), 모욕은 ‘목욕’이 변한 말



담임선생님의 일장 훈시가 마무리되고 ‘종례 끝’이 선언되자마자 우리는 책보를 둘러메고 학교 울타리 개구멍을 빠져나와 하교를 하곤 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라 베트콩을 잡다 온 맹호, 백마, 청룡부대 아저씨들의 화랑무공훈장감 전투 얘기를 들으며 배운 군가를 목청껏 뽑으면서 땡볕에 산을 넘어 집에 오곤 했지요.

“멱 감고 가자.” 이미 땀으로 멱을 감은 우리는 동네 초입 개울에 이르면 논두렁 콩잎 두어 장을 따서 귓구멍, 콧구멍을 틀어막고는 첨벙 물에 뛰어들었지요. 월남 정글도 휘젓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늠름했던 우리는 콩잎 빠져나간 코로 물이 들어와도,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잠수에 다이빙도 하고 그랬는데….

“얘들아, 모욕하자.” 어릴 적, 추석이 가까워오면 엄마가 부엌에 목욕통을 갖다놓고 따스운 물을 부은 뒤 우리를 불러 모욕을 시키셨습니다(그때는 사람들이 다 ‘모욕’이라고 했음). 물 한 통이면 네 형제가 말끔히 모욕을 했지요. 항상 마지막 차례이던 형이 모욕을 마치고 일어서면 돌돌 말린 때 몇 가닥이 몸에 붙어 있기도 했지만.

미역과 그 준말 멱은 냇물 강물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씻거나 노는 것이지요. 모욕과 미역은 목욕(沐浴)이 변한 겁니다.

해가 뉘엿뉘엿하고 손발이 물에 불어 하얗게 쪼그라들 때쯤 달궈진 바위에 앉아 ‘빤쓰’를 말리던 동무들, 모욕 중에 간지러워 꿈틀대면 등짝을 찰싹 때리기도 하며 때를 밀어주시던 엄마의 따뜻한 손이 그립습니다.

어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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