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춤바람 난 공화국의 엘리트 대학생, 스윙을 부르다


 
가수 최희준은 그윽한 음색으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였다. 1996년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국민일보DB
 
최희준의 히트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가 담긴 음반.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스윙(swing). 야구의 방망이 돌림이 아니다. ‘(전후좌우로 몸을) 흔들다’라는 어원에 기반을 둔 이 음악은 1920년대 월가의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 때 잉태되고, 뉴딜 정책의 성공적인 안착으로 불경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30년대 중반에 미국 전역에 꽃을 피웠다. 스윙 음악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 각지에 진주한 미군을 따라 전 세계에 전파된, 10여명에서 30여명 사이로 구성된 악단에 의해 흥겹게 연주되는 댄스풍의 재즈다.

스윙 음악의 핵심은 싱커페이션(syncopation)에 의해 발생하는 관능적이고 유연한 4박자 스타일의 춤추기에 알맞은 리듬과 낭만적인 선율이다. 흔히 ‘당김음’이라는 이상한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싱커페이션은 설명하기 조금 까다롭다. 굳이 소개하자면 특정 박자의 지연 혹은 당김으로 정박자의 규칙적인 진행에서 벗어나 무언가 불안정하고, 동시에 무언가 원초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박자 감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싱커페이션은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유럽 고전음악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백인들의 악기로 근엄한 형식 속에 유폐된 리듬감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의 머나먼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음악적 유전자를 20세기에 표출한다. 대중의 춤을 위한 연주음악, 곧 스윙은 대중음악의 역사가 처음 만들어낸 전 지구적인 주류 상품이 됐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에 설치된 미군 캠프 내 클럽 무대에서는 쇼가 열리곤 했다. 전시와 전후에 활동 무대를 잃은 한국인 뮤지션에겐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었다. 이 시기에는 화양이나 유니버샬, 극동 같은 쇼 공급 대행업체의 프로모션을 통해 20여개의 쇼단과 40여개를 헤아리는 밴드가 이합집산과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미8군은 정기적인 악단 오디션을 통해 능력에 따라 각 악단의 등급을 AA부터 D등급까지 차등화했다. 이 등급은 곧 생계와 직결됐다. 각 등급별로 개런티를 받았고, D등급 판정을 받으면 다음 오디션까지 미8군 무대에 설 수조차 없었다.

영화배우 엄앵란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한 엄토미(엄재욱)와 베니김(김영순)은 이곳에서 활동한 악단들을 이끈 1세대 밴드마스터였다. 이들의 악단은 김희갑과 이봉조, 길옥윤과 신중현, 그리고 김인배와 박춘석 같은 뮤지션들을 배출했다. 특히 나중에 키보이스 같은 록밴드를 지휘하게 되는, 그리고 ‘향수’를 비롯해 3000곡 넘는 노래를 만드는 기타리스트 김희갑이 독립해 만든 에이원 악단은 AA등급을 받은 대표적인 악단이었다. 악단 중에는 김동석이 이끄는 웨스턴 주빌리쇼처럼 백인 취향의 컨트리 앤 웨스턴을 주 레퍼토리로 삼은 악단도 있었지만 거개가 스윙 재즈와 라틴 재즈를 주력으로 삼았다.

악단 중 하나인 파피쇼단의 마스터 김안영은 1960년, 고시엔 별로 관심이 없던 서울 법대 졸업생에게 미8군 무대 가수의 길을 권한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해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엘리트 코스의 반듯한 길만 걸어온 이 청년은 미국 노래를 흉내 내는 것보다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르고 싶어 작곡가 손석우의 작품집을 통해 대중음악계에 데뷔한다.

그의 첫 노래는 ‘그림자’였지만 이 노래는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이 노래와 같이 녹음했던 4곡 중 하나가 60년대를 지배하게 되는 슈퍼스타의 출사표가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최희준이고, 문제의 곡은 그가 부른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다.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는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들어도 신선하고 세련됐으며, 오히려 지금 노래에선 들을 수 없는 우아한 위트와 넉넉한 여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저 식민지 시대의 ‘사의 찬미’부터 해방과 전쟁의 혼란한 시기를 관통한, 우리 대중음악사에 길게 드리웠던 애상과 비탄의 커튼을 활짝 젖힌 음악이었다. 스윙 스타일의 청량한 리듬의 약동감을 바탕으로 꿀과 같은 매혹적인 달콤함을 보컬을 통해 빚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와 손석우라는 걸출한 밴드 리더가 만들어낸 산뜻한 연주와 편곡은 6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선택하고, 가수가 되고, 그리고 스타덤에 올라선 이 시기는 이승만 정권이 4·19와 함께 무너지고, 민주당 내각제 정부가 들어선 시기였다. 해방 이후 억눌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한꺼번에 융기하느라 하루하루가 새로운 열정으로, 혹은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혼돈으로 가득 찬 때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기억하듯이, 이 분출된 열망은 61년 5월의 군사 쿠데타로 짧은 막을 내리고 만다.

스윙 재즈 스타일의 대중음악이 60년대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식민지 말기의 경성엔 초보적인 스윙 밴드 연주회가 열렸고(이따금 홍난파도 참가하곤 했다), 38년엔 열일곱 살의 소녀 가수 박단마가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라는 획기적인 스윙 스타일의 히트곡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41년부터 미국과 영국, 소련으로 묶어진 연합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주적이 됐고, 이들의 문화는 한반도에서 금기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댄스음악 문화가 다시 창궐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 직후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 대한민국에서 국방뿐 아니라 서민 경제를 아우르는 민생의 생사여탈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우리는 미군의 구호 물품에 의식주를 의존해야 했다. 따라서 모든 의식과 무의식의 시선은 미군 부대로 향했다.

미8군 쇼단의 창궐은 자기 시장을 잃어버린 대한민국 대중음악인들의 출구 전략이 미군을 위한 엔터테이닝 무대였음을 간단하게 증빙해 준다. 미 주둔군 주변으로 형성된 기지촌의 문화 또한 당연히 미군을 향한 해바라기 문화였다. 이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춤과 노래의 유흥 콘텐츠가 순식간에 주역의 자리로 올라섰다.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대중음악계를 휩쓸고 있던 댄스 뮤직인 맘보가 가장 사랑을 받았다. 차차차와 탱고 같은 여타 라틴 댄스 뮤직도 동반 상륙해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들 라틴 리듬은 카리브해 오리지널이 아니라 미국의 문법인 재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윙 재즈로 재편된 춤 음악들이었다. 맘보는 쿠바의 리듬인 룸바가 미국의 스윙과 만나 만들어진 음악인 것이다.

55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최고의 음악은 우리의 노래가 아닌 쿠바 출신의 맘보 악단인 페레즈 프라도(Perez Prado) 악단의 맘보 음악 ‘체리 핑크 앤드 애플 블로섬 화이트(Cherry Pink and Apple Blossom White)’였다. 지금 세대들도 이 연주곡을 들으면 “아∼”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음악이다. 영어 제목이 너무 길어 그냥 국내에서는 ‘체리핑크맘보’로 회자되곤 했다. 26년 ‘사의 찬미’ 이후 우리말도 아닌, 그리고 한국 음악인의 곡도 아닌 노래가 그해 최고 인기곡이 된 경우는 아마 이때뿐이었을 것이다.

맘보 붐은 수많은 토착 맘보, 혹은 변형 맘보를 후속적으로 양산했다. 가령 최근까지 학교 응원가로 많이 쓰인 ‘닐니리 맘보’는 식민지 시대의 신민요 ‘닐리리야’를 맘보풍으로 재편곡한 것이다.

이러한 맘보의 붐은 새로운 사회 풍속도를 연출했다. 바로 ‘춤바람’이라는 문화다. 미8군 무대에서 기지촌으로, 그리고 기지촌에서 주택가로 번져간 이 문화는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도덕률이 붕괴되는 것과 발맞춰 충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54년 정비석의 연재소설 ‘자유부인’ 파문과, 이듬해 이른바 ‘제비’ 박인수의 공판 사건이 불러온 파장은 유교적 여성관이 일거에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50년대 중·후반 맘보 붐에서, 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이 주제가도 최희준이 불렀다)에 나온 트위스트 춤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 전후의 폐허기에서 고도성장을 향해 신발 끈을 조여 매는 도약기까지 대한민국 대중문화를 지배한 키워드는 바로 댄스와 댄스 뮤직이었다. 하지만 일본 메이지 유신식 근검절약과 퇴폐 풍속의 근절, 그리고 국가주의적 국민총화를 앞세운 박정희 정권의 파시즘적 규범이 이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댄스 뮤직의 선풍은 삼일천하로 끝이 난다.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선풍은 바로 이 댄스 문화의 정점에 핀 독자적인 창작물이었던 셈이다.

이 노래를 앞뒤로 해 미8군 무대의 음악인들이 속속 한국 대중음악 시장으로 귀환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현미라는 불세출의 가수를 보유하고 있던 이봉조 사단은 영어 노래에서 벗어나 한국 수용자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시장에 진출했다. 손석우는 미8군 출신인 한명숙에게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제공해 또 다른 신드롬을 만들었다. 그리고 패티김, 신중현 등이 속속 창작곡을 통한 자신의 존재 증명에 돌입했다.

남인수와 이난영에 의해 세워진 트로트의 ‘꾀꼬리 같은 맑고 청아한 발성’이 왕좌에서 물러나고 최희준 한명숙 현미를 관통하는 이른바 ‘허스키 보이스’가 새로운 보컬 트렌드로 부상한 점도 독특하다. 동양적 정취의 건너편에 서구적 뉘앙스가 본격적으로 한국대중음악사에 아로새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강헌 음악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