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비누가 말하네 “헛되고 헛되도다”…‘21세기 바니타스’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의 신미경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에 출품된 설치 작품 ‘폐허 풍경’. 비누 12t을 녹여서 고대 유적의 폐허를 재현했다. 최종학 선임기자
 
비누로 조각한 비너스상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신미경 작가. 최종학 선임기자
 
중국 청나라의 화려한 분채도자기를 재현한 일명 ‘번역 시리즈’. 최종학 선임기자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한숨짓는다.”

35세에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올랐다. 37세에 금배지를 달았고 지난 6월 92세로 타계하기까지 9선 국회의원을 했다. 대통령만 못했을 뿐 국무총리를 2번 지냈다. 누릴 건 거의 다 누린 그가 이런 묘지명을 남겼다.

한국 정치사의 풍운아 김종필 전 국무총리. ‘3김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가 남긴 글을 접하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 그리고 인생무상을 동시에 느꼈을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세상사 덧없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바니타스(Vanitas, 허무·허영을 뜻하는 라틴어) 정물화’다. 자본주의가 싹튼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중산층 사이에 인기 있었던 장르인데, 정물의 소재를 통해 부를 과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덧없음을 느끼고자 했던 이중적 장치였다. 화가들은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비싼 유리잔, 나침반, 지구의 같은 진귀한 물건과 함께 부패하기 직전의 파이, 농익은 오렌지 등을 그려 넣었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해골이 들어가기도 했다. 비누는 어떤가. 닳아서 없어지고 마는 숙명을 타고난 이 사물 말이다. 고급 향이 나는 비누라면 그 유한성이 더 애틋해진다.

중견 작가 신미경(51)은 비누를 대리석처럼 재료로 사용해 조각 작품을 만들어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 중국 도자기 등 동서양 미술사에서 권위를 지니거나 특정 문화를 상징하는 생산물을 감쪽같이 재현했다. 중국 청대 분채(粉彩) 도자기를 재현한 것은 반짝이는 광택까지 그대로 흉내 냈다.

마침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신미경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9월 9일까지)이 열리고 있으니 가서 확인해보라. 미술사 걸작에 기댄 신미경의 ‘비누 조각’이 ‘진짜 같은 짝퉁’에 대한 찬탄을 넘어 감동적인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비누의 속성 탓일 게다. 반영구적인 대리석이나 석고, 화강암, 도자기와 다르다.

비누는 매번 문지르면 화려한 거품을 일으키지만 언젠가는 마모돼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어떤 것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를 상기시키는 재질이다. 신미경의 비누 조각을 ‘21세기 바니타스’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신작과 함께 미발표작을 내놓은 이번 전시는 회고전 못지않게 그의 작품 세계의 궤적을 보여준다. 화장실에 비누 조각을 설치해 관객이 사용하게 한 다음, 유물처럼 내놓는 그 유명한 화장실 프로젝트도 볼 수 있다.

비누에 눈을 뜬 건 유학시절이다. 서울대 조소과 학·석사를 마치고 1996년부터 영국 슬레이드 미술대학에서 공부하던 그는 현지 박물관에서 본 고대 서양 조각의 대리석에 눈길이 갔다. 손톱으로 긁으면 자국이 생길 정도로 무른 그 성질이 꼭 비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학교 안에 있던 아프로디테 조각을 모각하는 퍼포먼스를 6개월간 진행했다. “동양애가 서양 조각을 똑같이 만든다”고 소문나며 삽시간에 유명인사가 됐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에 들어간 2000년대 중반부터 모각 대상은 중국의 도자기, 조선의 불상 등으로 확대됐다.

작가는 이런 일련의 작업에 ‘번역’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서양 유물을 비누로 새롭게 제작하는 행위 자체가 번역일 수 있겠다. 또 한 문화를 다른 문화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필히 생기는 오류나 문화적 재맥락화까지 의미한다.

공공미술관에서는 처음인 이번 전시에는 제목이 시사하듯 지금은 존재하지만 언젠가 사라지고 말 비누의 속성에 더 주목한 신작을 내놨다. 비누 12t을 녹여서 우유처럼 끓인 뒤 틀에 부어 거대한 대리석처럼 만들고, 이를 깎아서 폐허 유적을 재현했다. 잔해처럼 남은 벽돌과 도리아식 기둥, 난간, 중세 성벽의 애로 슬릿(화살을 쏘는 구멍)…. 목이 떨어져 나간 여신상이 나뒹군다.

작가는 “폐허는 남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의 경계”라며 “남은 흔적을 보며 사라진 것을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 그 안을 거닐었을 사람들까지도…”라고 말했다.

그는 ‘폐허 풍경’이라 제목 붙인 이 작업을 ‘시간성의 가시화’ ‘시간의 고체화’라고 표현했다. 전시장에 퍼져 있는 은은한 향은 끊임없이 그것이 비누 조각임을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폐허가 사람 소리로 넘쳐나던 시절, 그 과거에 살았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나 역시 그들처럼 사라져가는 유한한 존재임을 환기시킨다. 바니타스가 아니고 무엇이랴.

실패작을 재활용한 신작도 있다. 캐스팅할 때 잘못돼서 몸통이 기울었거나 이가 빠진 것들은 작업실 한쪽에 뒀었다. 작가는 이런 걸 꺼내서 순은이나 순동의 박을 입히고 산화액을 발라 마치 세월이 흘러 부식한 듯한 효과를 냈다. 도공이라면 즉석에서 깨버렸을 실패작이지만 ‘화석화된 시간: 브론즈’라는 제목을 달고 이렇게 새 의미를 부여받았다. 늙어가는 것, 버려진 것에 대한 다시 보기다. “예전에는 삶만 생각했습니다. 요즘에는 나이 탓인지 죽음도 생각하게 돼요.” 어느새 오십이 넘은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이렇게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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