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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52시간’의 역설… 이민 꿈꾸는 IT 인재들



정보기술(IT) 엔지니어 김건형(가명·37)씨는 3주 전부터 ‘독일 IT 기술 이민 스터디’ 모임에 나가고 있다. 멤버들과 함께 독일어 공부를 하고, 정착에 필요한 지역 정보 등도 공유한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동경하던 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워라밸 실현이 목적인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작된 후 본격 이민준비에 나섰다.

지난 6일 경기도 성남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씨는 “지난달부터 회사는 근무시간 단축에 들어갔지만 해야 할 일은 오히려 더 많아졌다”며 “퇴근 후에도 끝내지 못한 일을 하느라 집이나 회사 주변 카페에서 비공식으로 야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개인별 업무량이 줄었다면서 추가 채용에 나섰다. 새 직원들이 뽑히면 기존 인력의 월급은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김씨와 동료들의 생각이다. 김씨는 연봉이 1000만원 가까이 줄 것으로 예상했다. 그가 이민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같은 스터디 모임 멤버인 이권(가명·39)씨는 “독일은 토요일을 포함해 하루 8시간, 주 48시간 근로를 기본으로 하고 이공계 및 IT 업계 전문가를 우대하는 것으로 안다”며 “주변 IT엔지니어들 중 독일 이민을 고민하는 이들이 점차 생기고 있다”고 밝혔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예고됐던 혼란상도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IT업체 한 임원은 “근무시간이 줄어 발주처의 요구대로 성과를 내려면 결국 추가인력을 투입해야 한다”며 “정부의 한시적인 지원으로는 인건비를 충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직원들의 월급을 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 52시간제가 당장 적용되지 않는 300인 미만의 업체로 이직하는 직원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정부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 중인 300인 이상 기업이 근로자를 추가로 뽑으면 1년간 1인당 월 60만원을 지원한다.

이병태 카이스트 IT경영학과 교수는 “한 사람이 10시간에 하던 일을 두 사람이 똑같이 나눠 해도 부대비용 때문에 총 인건비는 늘어난다”며 “IT업계는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작업들이 많아 중간에 투입된 인력이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근무시간 단축으로 줄어든 월급 탓에 부업을 찾는 이들도 생기고 있다. 제조업 생산직 근로자인 박승광(44·경기도 수원)씨 가족의 월평균 생활비는 300만원이다. 외벌이인 박씨는 그간 잔업을 자처하며 수당을 벌어 자녀들의 학원비와 가계대출 상환금을 충당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박씨는 “최근 직업소개소를 찾아 주말 일용직 ‘알바’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9일 현재 주 52시간 근무제와 관련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800건 중 대다수는 ‘급여 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매달 연장·휴일·야간근로 수당을 더해 삶을 꾸려가던 근로자들이 더 이상 해당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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