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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이흥우] 대한문



광장 조성 이후 광화문은 조선 법궁 경복궁의 정문으로서 위용이 한층 높아졌다. 그에 비하면 대한제국 황궁이었던 덕수궁의 정문 대한문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대한문은 원래 덕수궁 동문이었으나 남문인 정문 인화문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정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고종 치하 덕수궁 정문은 민중의 대황실 의견 표출창구였다. 독립협회와 황국중앙총상회가 1898년 10월 8일 덕수궁 정문(당시는 인화문) 앞에서 민중집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한말 이후 3·1운동 즈음까지 대한문은 항일 민중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3·1운동 참가자의 최종 목적지도 대한문이었다.

탑골공원에서 행사를 마친 3·1운동 참가자 중 일부는 종로를 거쳐 광교, 남대문 정차장(지금의 서울역)을 돌아 프랑스 공사관으로 행진했고, 다른 대열은 종로를 지나 대한문 앞에 이르러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들 중 일부는 제지하는 일제 군경을 물리치고 대한문 안으로 들어가 고종황제 영전에 조례(弔禮)를 행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한다. 이때 대한문 앞에 모인 군중은 일제 측 기록에도 1만명이 넘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대한문 앞은 전혀 다른 성격의 태극기가 휘날리는 곳이 돼버렸다. 탄핵정국 때 탄핵을 찬성하는 ‘촛불’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자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가 대한문 앞을 차지하면서 빚어진 현상이다.

쌍용자동차 노조가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른 번째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주승씨 분향소를 대한문 앞에 설치해 태극기시민혁명국민운동본부 측과 마찰이 빚어졌다. 앞서 쌍용차 노조는 2012년 4월부터 1년가량 분향소를 운용했었으나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서울 중구청에 의해 강제 철거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국본 측은 “대한문은 태극기의 안방”이라며 대한문 앞을 내줄 수 없단다. 자신들이 먼저 집회신고를 했기 때문에 우선권이 있다는 거다. 함께 쓰면 좋을 텐데 법이란 게 때론 이렇게 야속하다.

이흥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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