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추상으로 빚은 생명

최만린, ‘태(placenta) 08-27’. 1980. 브론즈. 리안갤러리


동글동글 부드러운 듯한데 힘차다. 유연함과 강인함, 수축과 팽창이 교차하고 차분하지만 역동적인 움직임이 분출한다. 굵은 붓에 먹을 듬뿍 묻혀, 툭툭 점(點)을 찍으며 대나무를 그린 뒤 입체로 옮긴다면 이런 조각이 나올 것만 같다. 천체 속 별자리, 아니 동물의 뼈마디를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은 한국 추상조각을 대표하는 작가 최만린(1935∼)의 ‘태(胎)’이다.

최만린이 ‘태’ 연작을 내놓게 된 것은 뉴욕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 때문이었다. 경기중 3학년 때 ‘국전’에서 덜컥 입선하는 바람에 ‘천재’ 소리를 들으며 승승장구했던 그는 서울대 교수 시절 록펠러재단의 초청을 받았다. 뉴욕 프랫대학에 적을 두고, 거침없이 분출하는 미국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던 작가는 그러나 서양의 미감을 그대로 쫓아선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귀국 후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형상화하는 데 혼신을 다했고, 그 결과 ‘생명성’에 귀착하게 됐다.

1970∼80년대에 봇물처럼 터져 나온 최만린의 ‘태’ 시리즈는 살아 꿈틀대는 유기적 형태가 특징이다. 생명체가 잉태돼 세포분열을 하듯 동그란 알에서 상하 좌우로 뻗어나가다가 원형으로 응축되기를 거듭하는 작품은 유연한 곡선과 힘찬 수직선, 대칭적 형상이 잘 어우러진다. 이 땅의 생명체에 내재된 에너지가 탄탄하게 압축되며 최만린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이 됐다.

이후 작가는 생명의 근원적 형태를 더욱 심화시키며 ‘맥’ ‘?’ 연작을 내놓았다. 근래 들어 최만린은 모든 표현을 덜어내고 비우는 데 몰두하고 있다. 점 하나, 원(圓) 하나로 종결지은 작업은 ‘무(無)’를 통해 근원에 맞닿으며, 그의 예술탐구가 완성기에 접어들었음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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