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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족적 뒤의 그림자… 시선 엇갈리는 ‘JP 추도’



5·16 쿠데타 주역이면서 첫 민주적 정권교체 큰 기여
산업화 이바지했지만 지역·계파주의 심화 비판도
양면적 행보에 평가 복잡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3김(金) 시대’의 마지막 문을 닫고 지난 23일 영면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JP가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는 특별하다. 40여년 정치인생 대부분을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권력의 정점에서는 한발 비켜선 영원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 군부독재의 탄생과 유지에 주동적 역할을 한 동시에 헌정 사상 첫 민주적 정권교체에도 큰 힘을 보탠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한 명이자 문민화·민주화 이행에도 기여한 인물이라는 양면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 영욕의 정치 역정은 한국 정치사 자체이기도 하다.

‘정치 풍운아’로 불렸던 JP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육사(8기)를 졸업했다. 중령 때인 61년 처삼촌 박정희 소장의 5·16 쿠데타에 가담했으며 35세에 초대 중앙정보부장, 45세에 국무총리를 맡아 정치 전면에 나섰다. 79년 10·26 사태 이후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찍혀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을 당하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까지 받는 등 JP·YS·DJ 3인은 모두 정치적 겨울을 보내야 했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산물인 대통령 직선제는 이들을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세웠다. 같은 해 말 대선에서의 YS·DJ 단일화 실패에 따른 야권 분열은 정치 지형을 3김의 합종연횡에 좌지우지되도록 바꾸는 계기가 됐다.

JP와 YS는 90년 집권여당과 손잡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으며, YS는 이를 기반으로 2년 후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JP는 95년 탈당해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을 만들면서 YS와 결별한다. 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이던 DJ와 ‘DJP 연합’을 성사시켜 DJ의 대통령 당선과 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각제 개헌을 소신으로 내세웠던 JP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줄곧 킹메이커에 머물렀다.

JP는 김대중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맡았지만 2001년 DJP 연합을 파기했다. 노무현정부 때인 2004년까지 자민련 총재로서 재기를 모색했으나 그해 17대 총선에서 참패하자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92세를 일기로 별세하면서 3김 시대는 역사적, 물리적으로 완전한 종언을 맞았다.

양승함 연세대 명예교수는 24일 “3김 정치는 3명의 보스가 나름의 정치세력을 형성해 초보적 단계에서나마 민주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의 기본적 틀을 형성한 시기였다”고 말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3김이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견제하거나 동맹을 맺으면서 민주화의 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JP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산업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주도한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라는 평도 있지만 지역주의와 계파주의를 심화시켜 정당정치를 퇴행시켰다는 꼬리표 역시 따라다닌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시대는 그 시대의 논리와 방정식에 따라 풀려가는 것”이라며 “JP는 은퇴 후에도 쓴소리를 많이 하는 등 원로로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JP 빈소를 찾아 “한국 현대사의 오랜 주역이었기에 정부로서 소홀함 없이 모실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JP에게 국민훈장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지호일 이형민 기자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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