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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0시… 운전대 잡은 그녀가 사우디 도로를 달렸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헤사 알 아자지가 24일 새벽(현지시간) 렉서스 승용차를 몰고 리야드 탈리아 거리를 지나고 있다. 사우디 당국은 사상 처음으로 이날 0시 여성 운전을 전면 허용했다. AP뉴시스


해금되자마자 차 몰고 거리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바뀔 것”, 2000여명 운전면허 취득
남성들의 해코지 우려한 당국…도로에 경찰력 집중 배치
정부, 女인권보다 경제효과 초점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헤사 알 아자지(33)가 수도 리야드의 한 거리에서 아버지의 2016년식 렉서스 승용차 운전석에 앉은 시각은 23일 오후 9시10분(현지시간)이었다. 사우디 국왕 칙령은 2시간50분 뒤인 24일 0시부터 여성 운전을 허용한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알 아자지는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까지 직접 차를 몰고 가 햄버거를 사오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검은색 ‘아바야’를 걸쳤다. 입술에는 립스틱을 조금 발랐다.

알 아자지는 24일 새벽 리야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음악을 들었다. 미국 유학 시절 운전을 배운 그녀는 그때처럼 부드럽게 차로를 바꾸고 컵홀더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라디오 채널을 바꿨다. 그녀는 동승한 뉴욕타임스(NYT) 기자에게 “내가 좀 말썽꾸러기이긴 하다”면서도 “지금 아주 신난다”고 말했다.

사우디 당국은 남성들이 여성 운전자를 해코지할까 우려해 도로에 경찰력을 집중 배치해뒀지만 다행히 알 아자지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필리핀계 남성인 맥도날드 직원은 돈을 건네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뒤에서 기다리던 사우디 남성 운전자는 앞차 창문에서 여성 손목이 나오자 “당신이 자랑스럽다” “당신에겐 모든 권리가 있다”고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우디는 지구상에서 여성 운전을 금지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운전은 남성에게만 허용됐고 여성은 무조건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사우디 여성들은 1990년 리야드에서 차를 몰고 시위를 벌인 이후 운전할 권리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여성들은 사우디 정부가 건국 이래 처음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한 24일 0시가 되자마자 일제히 차량을 끌고 거리로 나왔다. 여성 심리학자 사미라 알 감디(47)는 현지 일간 사우디 가제트에 “우리는 준비됐다. 이제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SNS에도 첫 운전의 소감을 적은 여성들의 글과 사진, 동영상이 잇달아 올라왔다. 한 여성은 트위터에 “여성 운전자를 향해 불필요하게 경적을 울리거나 상향등을 비추지 마라. 여성 대부분은 초보운전자”라고 글을 남겼다.

여성의 운전금지 폐지는 왕위 계승 1순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탈석유 시대 대비책 ‘비전 2030’의 일환이다. 유가 불안정으로 현재의 석유 의존 경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고 여성의 사회 참여와 대중문화, 관광산업 등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다. 이미 운전면허를 취득한 사우디 여성은 2000여명으로 알려졌다. 운전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사우디 여성 인구는 900만명으로 집계되며, 향후 600만명이 면허시험에 응시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사우디 여성 인권이 근본적으로 향상되는 계기가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사우디 정부는 여성 운전 허용을 한 달 앞둔 지난달 여성 인권 활동가 10여명을 체포해 지금까지 구금하고 있다. 아버지 남편 아들 등 남성의 동의 없이는 여성 혼자 결혼, 여행, 교육, 취업 등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남성 보호자(마흐람) 제도도 폐지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무함마드 왕세자는 여성 활동가를 구금함으로써 다른 활동가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면서 “개혁은 지도자가 사우디 국민에게 보내는 시혜이지 쟁취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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