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남북 철도 연결 땐 화합의 음악축제 꿈꿀 수 있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1997·사진)는 괴짜로 이름이 높았다. 연주 여행을 갈 때면 늘 호텔방 침대 바로 옆에 피아노가 있어야 했고, 피아노 의자 높이에 유달리 민감했으며, 인공조명을 싫어해서 콘서트를 할 때도 어두침침한 최소한의 조명을 요구하고, 무엇보다 아무리 쉬운 곡이라도 반드시 악보를 펼쳐놓고 연주했다. 사교성이 부족했던 이 연주가를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세계 각국에 투어를 보내며 공산 정권의 예술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때 너무 시달린 탓인지 그는 스탈린의 사망 뒤 모스크바 자택에서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은둔생활을 고집했다.

그의 독특한 여행 습관 중 하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나이 들어 심해진 고소공포증 때문이었는데, 그는 멀리 해외 투어 일정이 잡히면 늘 직접 운전을 해서 이동하거나 기차와 배를 이용했다. 당연히 그의 이동 시간은 다른 연주자들보다 갑절이나 걸렸는데, 도중에 머물게 되는 도시나 마을에서 예정에 없던 독주회를 무료로 개최하기도 했다.

1986년 그는 자동차를 타고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긴 국내 투어를 가졌다. 유라시안 횡단철도 노선을 방불케 하는 강행군 중에 그는 7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려 91회의 연주회를 소화해냈다. 반드시 번듯한 콘서트홀이 아니어도 좋았다. 교회든 마을회관이든 학교 강당이든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피아노도 낡은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조율되지 않은 채로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리히테르가 94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진다는 소식은 당시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였다. 소련이 붕괴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괴벽을 익히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택이 있는 동쪽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부산항에 입항, 그곳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긴 여정이 부담이 될 법도 했지만 정명훈이 지휘하는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독주회를 모두 성공적으로 마치며 거장의 위엄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다음 콘서트가 예정된 독일로 홀연히 떠났다.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리히테르에게 대한민국은 대륙에 이어진 반도임에도 불구하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립된 ‘섬’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 섬이 지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으로 다시 대륙에 속할 기회가 찾아왔다. 정상회담에 이은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을 주요 의제로 다뤘다.

지난주 러시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철도가 연결이 되고, 그 철도가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이 된다면 우리 한국으로부터 유럽까지 철도를 통한 물류 이동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경의선, 동해선, 금강산선이 복원되면 경제만 좋아질 일이 아니다. 남북한 음악 교류에 앞장섰던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 통영 국제 음악제도, 휴전선으로 분단된 강원도에서 개최되는 대관령 음악제도 모두 북쪽을 향한 평화의 메시지를 던질 명분이 있다. 게다가 대관령 음악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마린스키 극동 페스티벌과 2016년 상호 교류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바 있다. 남해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남북이 화합하는 음악축제 릴레이를 꿈꿔도 되지 않을까.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