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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기본소득, 유토피아로 가는 길

스위스는 2016년 6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부결됐다. 하지만 이 투표는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를 세계적으로 환기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사진은 투표가 실시되기 한 달 전 스위스 제네바 플랑팔레 광장에 설치된 대형 현수막이다. 현수막에는 ‘기본소득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다. AP뉴시스




기본소득 논의를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벽은 윤리적 반감이다. 많은 이들은 일을 하지 않거나, 일을 하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는 건 잘못됐다고 여긴다. 그것은 “게으름이라는 악덕에 상을 주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성경 말씀부터 떠올릴 것이다.

‘21세기 기본소득’은 이 같은 생각을 지닌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을 위한 책이다. 기본소득 운동의 주창자인 벨기에 철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가 자국의 젊은 정치학자 야니크 판데르보흐트와 함께 썼다. 집필에만 12년 매달린 끝에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노작(勞作)이라고 한다. 두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규모 실업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기본소득이야말로 온갖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봉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방대한 스케일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두 저자는 기본소득이 젖줄을 대고 있는 인류사의 수많은 복지정책들을 하나씩 소개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지속 가능한 제도인지, 정치적인 갈등을 풀무질할 여지는 없는지 면밀히 살핀다. “기본소득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분석한 최고의 안내서”(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또박또박한 어조로 무엇 하나 눙치는 것 없이 기본소득이 얼마나 근사한 정책인지 들려준다. 얼마간 딱딱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따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적지 않지만 기본소득의 얼개를 개관하고 싶다면 안성맞춤인 신간이다. 기본소득 반대론자의 반박은 웬만큼 다 걸러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논증의 그물코가 촘촘하다.

저자들이 내놓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일단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모두에게 생계를 지탱할 수 있는 돈이 지급되는 셈이니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 힘들고 임금이 낮은 일터에서는 직원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나쁜 일자리”가 도태된다. 재원은 어디서 끌어와야 할까. “소득세로 마련해 우선 부분적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공공부조와 사회보험의 추가액들로 보조”하는 게 해법이다. 책에는 기본소득의 구체적 액수까지 명시돼 있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받는 금액이 자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곁가지일 뿐이다. 핵심은 이런 대목이다. 저자들은 기본소득이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킬 것으로 내다본다. 두 저자는 “기본소득의 목적은 그저 빈곤의 참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다 함께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적었다.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노동시간을 얼마간 줄일 수 있다. “만인의 실질적 자유”라는 유토피아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일을 덜하면 지갑이 얄팍해지니 소비를 줄이게 되는데, 저자들은 이게 바로 “기본소득이 노리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경제는 정신의 건전성도 되찾아야만 한다. 건전한 정신의 경제는 사람들이 병들지 않도록 경제를 조직하는 방법뿐 아니라 (이를) 일반화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자체가 급진적인 정책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미 이 제도는 청년배당 노령연금 아동수당 같은 이름으로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저자들은 기본소득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하진 않는다. 이들은 “무수한 실망과 무수한 퇴보가 있겠지만, 이는 보편적 참정권을 위한 싸움과 노예제 폐지를 위한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면서 이렇게 적었다. “유토피아의 비전은 하루아침에 현실로 바뀌지 않지만, 그러한 노력은 우리에게 힘을 주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 모두가 굳건히 설 수 있는 든든한 경제적 발판을 얻게 되는 날이 올 것이며, 그때가 되면 우리는 이게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하고 의아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가 21세기 들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건 여타의 개혁안으로는 경제적·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난망하게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프롤로그의 시작을 장식한,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말을 되새기게 된다. “수중에 있는 돈은 자유의 도구지만, 기를 써서 벌어야 하는 돈은 노예를 만드는 도구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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