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나그네 서정, 식민지 한반도를 지배하다


 
가수 백년설의 얼굴이 담긴 ‘백년설 특선집’ 음반의 재킷. 백년설은 일제강점기에 내놓은 노래 ‘나그네 설움’으로 망국의 아픔을 달래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1940년대에 출간된 한 노래책에 실린 ‘나그네 설움’의 노랫말(위쪽 사진)과 나그네 설움’이 담긴 LP(아래 사진).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청록파의 시인 박목월에게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는 황홀한 별칭을 안겨주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시 ‘나그네’는 해방 직후인 1946년 공동 시집 ‘청록집’을 통해 발표됐다. 같은 청록파 동인인 조지훈의 ‘완화삼’에 대한 화답시로도 유명한 이 위대한 시편을 관통하는 정서가 바로 이 시의 제목인 ‘나그네’다.

식민지 시대였던 20세기 전반 한반도의 예술사는 다양한 예술 갈래에서 수많은 ‘나그네’를 분만했다. 수천 년간 농경과 정착의 특성을 강하게 지녔던 민족적 정체성을 감안한다면 ‘나그네’는 단순한 낭만 너머의 어떤 현실적 비극성을 자연스럽게 환기시켜준다.

정확한 시장 통계가 없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식민지 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노래로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곡이 바로 이 나그네 정서의 극점을 표현한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다. 1940년 벽두에 출시된 이 노래는 두 달 만에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10만장 돌파 음반으로 기록됐다. 아울러 식민지 시대에 가장 많이 팔린 음반 두 장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머지 한 장은 100만장 넘게 팔렸다는 비공식 기록을 보유한, 서편제 명창 임방울의 판소리 ‘춘향가’ 한 대목인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다.

백년설의 등장으로 일천한 역사를 가진 식민지 조선의 음반 산업은 새로운 구도를 띠게 된다. 백년설이 ‘애수의 소야곡’으로 슈퍼스타가 된 남인수와 건곤일척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남인수와 이난영을 내세우고 있던 이철의 오케레코드에 비해 마이너 음반사였던 태평레코드는 일약 메이저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오케 vs 태평’ ‘남인수 vs 백년설’의 구도는 그 이후 ‘지구 vs 오아시스’ ‘남진 vs 나훈아’라는 처절한 라이벌전이 형성되기 전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라이벌 시대가 개막했음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이와 동시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로 연착륙한 트로트 양식이 식민지 조선 최초의 주류 음악 장르로 확립되었음을 알리는 하나의 마침표였다.

백년설의 노래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등장했고, 일본 제국주의가 극점을 향해 치닫는 1941년 태평양전쟁 직전 해에 발표된 곡이었다. ‘나그네 설움’은 ‘목포의 눈물’이 은유했던 망국의 서러움을 넘어 식민지 총동원령 아래 일상적인 삶의 뿌리가 뽑혀 나가던 식민지인의 절망을 아련하게 그려냈다.

‘오늘도 것는다 만은/ 정처업는 이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엿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흘을길은 한이업서라….’

이 걸작의 노랫말을 쓴 이는 당시 태평양 악극가무단의 극작가이며 작사가이기도 했던 조경환이었다. 작곡가 나화랑의 동생이면서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 출신인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요주의 인물로 일본 경시청에 찍힌 인물이었다. 백년설도 당시 일본 공안을 뒤흔들었던, 김일성이 주도한 동북항일연군에 의한 보천 주재소 습격사건과 연관돼 있다는 의혹을 받곤 했었다. 백년설과 관련된 의혹은 잘못된 정보를 제보한 조선 밀정 탓이었다.

조경환은 밤새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의 취조에 시달리다 풀려난 새벽, 광화문의 뒷골목 목로주점에서 술 한 잔으로 울화를 풀다가 담뱃갑에 문구를 끼적였다. 그리고 이 문구로부터 ‘나그네 설움’은 탄생했다. ‘낯익은 거리다 만은 이국보다 차워라….’

자신의 땅에서조차 숨죽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 한숨처럼 흘러나와 담뱃갑의 여백을 채운 것이다. 이 구절은 나중에 ‘나그네 설움’의 가사가 된다.

이 노랫말에 선율을 붙인 작곡가는 당대 최고의 트로트 작곡가 박시춘의 아성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었던 동경고등음악학원 출신인 신예 이재호였다. ‘조선의 슈베르트’라고 불린 그는 ‘나그네 설움’과 더불어 백년설의 두 번째 성공작인 ‘번지 없는 주막’과 또 다른 히트작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를 썼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선’ ‘산유화’ ‘단장의 미아리고개’ 같은 수작들을 줄줄이 발표했다. 그의 선율은 따뜻하고 유려하며, 단조가 일색인 트로트계에서 장조 오음계를 훌륭하게 구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와 같은 이재호의 멜로디 라인은 소박하고 서민적인 울림을 가진 백년설의 보컬과는 마치 지음(知音)의 조화를 이루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동순 교수는 백년설의 목소리에 대해 시인답게 아름답게 묘사했다.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꼭 주막집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눈 오는 마당을 혼곤히 넋을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뭔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한 백년설의 가창은 여러모로 남인수의 화려한 고음부와 비교된다. 이동순은 남인수와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인수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쇳소리로 무엇인가를 호소하고 가슴속에 가라앉은 혼을 불러일으킨다면 백년설의 특징은 오직 한없는 부드러움에서 모든 것이 풀려나온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남의 아픔을 연민으로 감싸고 등을 쓸어주며 고통을 위로해 주는 힘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의 성음(聲音)을 우리는 외유내강의 세계와 견주어 볼 수 있다.”

이동순의 비교에 굳이 덧붙이자면 남인수의 발성이 고려청자의 미학을 담았다면 백년설의 목소리는 조선백자의 기품을 닮았다. 그의 소리는 연약한 듯 강한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마치 가야금의 농현(弄絃)과 같은 외로운 여운이 노래의 배경에 늘 존재한다. 아마도 이러한 미감이 식민지 청중들에게 가슴 저미는 동감을 끝도 없이 불러냈으리라.

하지만 백년설이 마주한 시대는 정말이지 불운했다. 그는 식민지 시대 중에서도 제국주의가 가장 악랄하게 발호하기 시작한 1940년에 슈퍼스타가 됐다. ‘나그네 설움’에 담긴 절망감을 못마땅해 했던 일본 총독부는 연이은 히트작 ‘번지 없는 주막’에도 시비를 걸었으며, ‘눈물의 백련화’에는 아예 판매금지라는 철퇴를 내렸다.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는 1941년부터 일본은 최후의 발악을 감행한다. 그들에게 협력적이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마저 폐간시켰고 학교엔 아예 조선어 금지령을 내렸다.

이 시기를 식민지 시대에서도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은 음반이고 공연이고 방송이고 모두 일본어로, 그리고 천황과 황군, 군국주의에 대한 찬양만이 허용됐기 때문이다. 아니 강요됐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백년설과 당대 스타들은 참혹한 비극의 문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군국주의의 부역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이미 1937년 육군 대장 출신의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국민가요(國民歌謠) 정책’은 1941년 태평양전쟁과 함께 노골적인 군국주의 찬양과 국민 동원을 선동하도록 만들었다.

백년설은 조선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아들의 혈서’(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를 녹음한 것은 물론 매일 경성라디오방송국으로 출근, 두 달 동안 생방송에서 이 노래를 불러야 했다(당시에는 녹음 방송이 불가능했다). 총독부는 1회 출연에 10원이라는 파격적인 출연료와 방송 출연 전후엔 차로 그를 데리러 갔다 태워서 오는 ‘특혜’까지 베풀었다. 조선 최고의 가수가 천황과 황군에 충성하고 있다는 이벤트를 그런 방식으로 연출한 것이다.

신민요의 여왕 이화자는 ‘결사대의 아내’를 불렀고, 1943년에는 남인수와 박향림, 백년설이 트리오를 이뤄 ‘혈서 지원’이라는 국민가요를 취입한다.

이 암흑기의 강요된 경력이 그에게 ‘친일부역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만다. 하지만 백년설과 그 동료들을 노골적인 부역 행각을 적극적으로 펼친 진성 친일파들과 한 무리로 취급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그는 와세다대학 수학 후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사한 친형 이혁룡(백년설은 예명이고 본명은 이갑룡이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민족주의 문학청년이었다. 그래서 가수가 되면서 스스로 지은 예명도 백두산의 서설과 같은 백의민족의 기상을 가지고 살고 싶다는 뜻에서 백년설(白年雪)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부르고 식민지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노래들 때문에 그는 늘 경찰서 문턱을 드나들어야 했다. 신곡을 발표할 때면 그 노래의 저의를 의심한 총독부와 갈등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왜소한 식민지 조선의 스타는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서 감동적인 목소리와 뜨거운 가슴 말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가 피할 어떤 공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의 부역 행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어떤 은폐의 시도도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암흑기 3년간의 행적으로 그의 삶과 예술 모두를 단죄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다.

해방 후 그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1963년 은퇴를 선언한 뒤 평생 노래한 ‘나그네 설움’처럼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1980년 머나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2003년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그를 기리는 백년설 가요제가 열렸지만 친일 시비로 그다음 해부터는 열리지 못했다. 경남 진주에서 거행되던 남인수 가요제 또한 문을 닫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나는 이들이 과오보다는 식민지 대중을 위무하고 그 시대의 시련을 아름답게 표현한 공적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과오는 정확히 기억하되, 그 예술은 기리는 여유로움이 허용되는 때가 언제 도래할는지 지금으로선 알 순 없지만 역사와 대중예술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시각이 공유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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