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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번호 ‘716’ 법정 선 날… “그립습니다” 읊조린 봉하마을

뇌물수수와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모두진술을 작성한 서류를 손에 든 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공동취재단

 
양복에 수인번호 ‘716’ 배지 단 MB… “檢, 무리한 기소”

이명박 전 대통령이 23일 낮 12시59분쯤 서울중앙지법에 모습을 나타냈다. 지난 3월 22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후 62일 만이다.

이 전 대통령은 수의가 아닌 검은색 양복에 넥타이를 하지 않은 흰 셔츠 차림으로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며 호송차에서 내렸다. 손에는 법정에서 낭독하기 위해 준비한 입장문을 담은 노란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의 얼굴은 구속 전보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변호인들은 이 전 대통령이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복용하는 등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전한 바 있다.

호송차에서 내린 이 전 대통령의 손에 수갑은 보이지 않았다. 앞서 구속 수감됐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해 같은 날 수갑이 채워진 채 법정에 출석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지난달 초부터 여성이나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등에 한해 구치소장의 허가로 수갑이나 포승줄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관련 지침이 변경됐다”고 설명했다. 77세인 이 전 대통령은 노인에 해당돼 서울동부구치소장 허가 아래 수갑과 포승줄 없이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 대통령은 오전 11시30분 구치소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뒤 낮 12시25분쯤 출발, 30여분 만에 법원에 도착했다. 이 전 대통령은 오후 2시 구속 피고인 대기실에서 형사대법정 417호로 입장했다. 무거운 표정으로 피고인석으로 향하는 이 전 대통령의 걸음을 따라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정계선 부장판사는 재판에 앞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재판 시작 전까지 법정 내 촬영을 허가했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직업이 뭡니까”라고 묻자 이 전 대통령은 쉰 목소리로 “무직입니다”라고 답했다. 양복 왼쪽 옷깃에 수인번호 ‘716’이 적힌 동그란 배지를 단 채였다. 앞서 호송차에서 내릴 때는 배지를 달고 있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호송차에 배지를 떨어뜨렸다가 법정에 출석하면서 다시 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 강훈 변호사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재판부가 “피고인, 변호인과 마찬가지로 공소사실 부인하는가”라고 묻자 이 전 대통령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전 대통령은 법정에서 3100여자 분량의 입장문을 천천히 읽었다. 재판부가 “앉아서 해도 된다”고 했으나 이 전 대통령은 선 채로 끝까지 낭독했다. 읽던 중 마른기침을 하며 정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법정에는 이 전 대통령의 세 딸이 나와 아버지의 재판을 지켜봤다. 부인 김윤옥 여사, 아들 이시형씨는 없었다. 이재오 자유한국당 상임고문도 방청석에 모습을 보였다. 재판 시작 1시간 뒤 잠시 휴정되자 이 전 대통령은 법정을 나가면서 가족, 지인 등과 여유롭게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재판은 시작한 지 5시간이 지난 오후 7시6분에 끝났다. 이 전 대통령은 변호인단에게 “수고했습니다”, 방청석을 향해서는 허탈하게 웃으며 “오늘 나도 모르는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았다”고 한 뒤 퇴장했다.

이날 검찰은 앞서 기소했던 다스 비자금 횡령, 국가정보원 자금 수수, 삼성그룹 뇌물 수수 혐의 등과 관련된 증인 명단과 물증 목록을 구체적으로 밝히며 향후 소송 계획을 밝혔다. 강 변호사는 “검찰의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앞으로 재판에서 구체적으로 밝혀나가겠다”고 말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살맛 나는 세상 문 활짝 연 분… 당신의 빈자리가 아쉽습니다”
봉하마을서 노무현 전 대통령 9주기 추도식


“당신의 꿈은 이미 우리의 꿈이 되었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권양숙 여사를 포함한 유족과 시민 등 6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이 엄수됐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공식 추도사를 통해 “구(舊)시대의 막내가 아니라 새 시대의 밀알로 거듭난 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정 의장은 “사람 사는 세상, 살맛 나는 세상의 문은 활짝 열렸지만 그 기쁨만큼이나 당신의 빈자리가 아쉽다”며 “어떤 가치도 평화 위에 두지 않겠다는 당신의 말씀 깊이 간직하고 실현해 나가겠다. 시민의 힘으로 열어나갈 대한민국의 새로운 내일을 지켜봐 달라”고 강조했다.

‘평화가 온다’를 주제로 한 올해 추도식은 박혜진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됐고 국민의례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추모영상 상영, 유족 인사말, 추도사 등이 이어졌다. 가수 이승철이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추모공연을 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시민합창단의 ‘아침이슬’ 추모공연도 진행됐다.

추도식에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홍영표 원내대표, 민주평화당 장병완 원내대표, 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각 정당 대표와 국회의원, 지자체장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해찬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이재정·정영애·윤태영·전해철·이광재·차성수·천호선 이사 등 노무현재단 임원 및 참여정부 인사들도 다수 자리를 지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 유족을 대표해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이, 정부 측에서는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과 대통령비서실 한병도 정무수석 등이 참석했다. 유족을 대표해서는 아들 노건호씨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건호씨는 “한반도의 평화정국은 지금도 조마조마한 순간들을 헤쳐 나가고 있다”며 “내년 10주기에는 부디 북의 대표도 함께할 수 있을 정도의 상황과 여건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인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경남지사 후보는 이날 하루 선거운동 일정을 비우고 온종일 추모객을 맞았다. 김 후보는 추도식 시작 전 기자들과 만나 “추도식을 찾아주신 국민들의 마음속에 노 전 대통령께서 꿈꾸던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이 다 녹아있다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도 “우리들은 노 전 대통령을 ‘대장’이라고 불렀다”며 장문의 추모 글을 남겼다. 드루킹 사건을 겨냥한 듯 “저도 요새 들어 여러 군데 두들겨 맞았다”며 “어둠에 맞서는 제 근육이 더 단단해졌다”는 언급도 있었다.

추도식을 찾은 이모(64·김해시 내동)씨는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노 전 대통령”이라며 “이제는 추도식이라기보다 축제로 승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왔다는 윤모(61)씨도 “노 전 대통령이 평소에 평화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며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도 잘 마무리해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의 꽃이 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추도식에 앞서 자원봉사단체는 노 전 대통령의 상징인 노란색 풍선과 바람개비 등을 나눠 주며 추도식 열기를 달궜고, 노무현재단은 참석자들에게 점심 도시락 2000개를 준비해 나눠줬다.

김해=이영재 기자, 김판 기자 yj3119@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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