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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회장, 뚝심·정도경영 23년… ‘초우량 LG’ 일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1995년 2월 회장으로 취임하며 LG 깃발을 흔들고 있다. LG 제공


구본무(왼쪽) 회장이 2002년 5월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LG 제공


구 회장(가운데)이 2015년 12월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LG사이언스파크 건설 현장을 점검하는 모습. LG 제공


20일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구 회장의 빈소를 구광모 상무가 지키고 있다. LG 제공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LG그룹의 오늘을 만든 설계자이자 실행자다. 1995년 회장 취임 직전 사명을 ‘럭키금성’에서 LG로 바꾸고 회사 얼굴인 CI(회사 이미지)도 현재처럼 변경하는 일을 주도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 빅딜’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중도 포기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99년부터 시작된 계열분리, 지주사 전환 과정을 잡음 없이 마무리했다.

구 회장은 75년 럭키(현 LG화학)에 입사해 럭키금성그룹 부회장, 금성사 대표이사 부회장 등을 거쳐 95년 50세 나이로 고(故) 구인회 선대회장, 구자경 전 회장에 이어 LG그룹 제3대 회장에 올랐다. 회장 취임 일성으로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 최고를 성취해야 한다”며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과감한 도전의 대표적 결과물이 세계 정상에 오른 디스플레이다. 구 회장은 98년 말 반도체 사업 유지가 불투명해지자 LG전자와 LG반도체가 하고 있던 LCD(액정표시장치) 사업을 분리해 LG LCD를 설립했다. 사업 첫해인 95년 임직원 수 1100여명, 매출액 15억원 규모의 회사를 지난해 말 임직원 3만3000여명, 매출 27조원의 회사로 키웠다.

2차전지 사업도 그의 혜안과 뚝심이 빛을 발한 분야다. 90년대 초반 사업을 시작했으나 한때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구 회장은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라”고 독려했고, 그 결과 지난해 말 전기차 배터리 수주 잔액만 42조원에 달할 정도로 큰 성과를 거뒀다.

반면 현대그룹에 넘겨준 반도체는 구 회장 일생의 한(恨)으로 남았다. 89년 금성일렉트론을 설립하며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구 회장은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키웠으나 99년 빅딜에서 현대그룹에 사업을 매각했다. 구 회장은 당시 충격으로 빅딜 과정에 개입한 전국경제인연합회 모임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57년간 동업해온 허씨와의 계열분리도 ‘아름다운 이별’로 매듭지었다. 구 회장은 계열분리 전까지 허창수 GS그룹 회장과 함께 보고받는 등 동업자를 예우했다. 2005년 3월 GS그룹 출범식에선 “지난 반세기 동안 LG와 GS는 한 가족으로 지내면서 역경과 고난을 함께 이겨냈다”며 “앞으로도 1등 기업을 위한 좋은 동반자가 되자”고 말했다.

구 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지배구조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자 대기업 중 처음으로 지주사 체제로 전환을 서둘렀다. 2003년 3월 통합 지주사 ㈜LG를 출범시킨 덕분에 LG그룹은 대기업 중 유일하게 지배구조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평소 인재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구 회장은 4조원을 투입해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 ‘LG사이언스파크’도 탄생시켰다. 지난해 9월 사실상 생전 마지막 대외 활동을 LG사이언스파크 건설 현장 점검으로 할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밖에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희생한 평범한 사람을 기리는 ‘LG의인상’을 제정해 사회 공헌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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