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음반산업 시대 열어젖힌 빅히트곡… 유성기 덩달아 불티


 
윤심덕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총독부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성악가가 됐다. 단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윤심덕. 국민일보DB
 
윤심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 국민일보DB
 
고인의 삶을 다룬 영화 ‘사의 찬미’ 포스터. 국민일보DB
 
윤심덕과 함께 행방불명된 극작가 김우진. 국민일보DB


지난 100년간 한국인의 입길에 오르내린 노래들에는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가 녹아 있다. 사람들은 수많은 노래를 듣고 부르며 기뻐했고 아파했다.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았다. 국민일보는 ‘명작은 시대다’ ‘명화는 시대다’에 이어 가요계의 명곡들을 재조명하는 ‘명곡은 시대다’ 시리즈를 선보인다. 음악을 통해 한국인의 지난 100년을 돌아보는 연재물이다.

지금은 ‘희망가’라는 별칭이 더 익숙한, 박채선과 이류색이라는 두 기생에 의해 1921년쯤에 녹음된 ‘이 풍진 세월’이 한국 대중음악사의 여명이라면, 26년 소프라노 윤심덕(1897∼1926)에 의해 녹음된 ‘사(死)의 찬미’는 본격적인 음반 산업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비극적인 팡파르였다.

이 노래와 이 노래의 주인공이 비극적인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윤심덕 스토리는 두 번이나 영화로 제작됐고 소설로, 연극으로,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와 뮤지컬을 수놓은 여주인공들, 즉 문희 장미희 윤석화가 모두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윤심덕과 ‘사의 찬미’라는 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도 윤심덕이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얘기는 어찌어찌 귀동냥으로 들어 안다. 이 비극적인 드라마의 핵심은 동반 자살이다. 그것도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인한, 현해탄 밤바다의 관부연락선 상에서의 투신자살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대중문화계엔 수많은 죽음의 스캔들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죽음 이후 불과 20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 1세대 할리우드 아이돌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가 장파열로 요절한다. 그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날 여성 팬 두 사람이 병원 앞에서 자살했으며 장례식날까지 10명의 팬들이 그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 커트 코베인이나 메릴린 먼로의 경우처럼 스타의 자살이나 의문사는 대중에게 가장 강렬한 충격을 선사한다.

26년 8월 5일 동아일보가 이 불행한 연인들의 정사(情死)를 호들갑스럽게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한반도의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죽음 직전에 일본 오사카의 닛토(日東) 레코드사에서 윤심덕이 녹음한 ‘사의 찬미’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한반도 전역에서 유성기 신드롬이 일어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효율 높은 미약(媚藥)이다. 대량 생산과 대량 복제의 본질을 지니는 자본주의는 생명마저도 복제하려 들지만 그러나 죽음만큼은 복제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죽음은 결코 복제되지 않는 마지막 진본인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보기 드문 일본 유학파 두 남녀가 자살했다. 그리고 곧이어 죽은 여성의 유작 음반이 발표됐는데 그것은 ‘죽음을 찬미한다’는 제목을 갖고 있는 짙은 페시미즘의 노래였다. 마치 죽음을 예감하고 부른 것처럼…. 어떻게 이보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있겠는가.

당시의 식민지 대중이 이 매혹적인 죽음의 주술에 걸리는 그 순간은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고고성을 터트리는 시점이었다. ‘이 풍진 세월’ 이전에도 민요와 판소리의 눈대목(판소리의 여러 노래 중에 중요한 대목의 노래)을 녹음한 음반이 발매됐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기록적인 성격이 우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낙후한 식민지 경제 상황에서 눈이 튀어나올 만한 가격표가 붙은 음반이 대중적인 상품이 되기에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동반 자살이라는 비극적 드라마의 힘은 이와 같은 현실적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구체적인 판매수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사의 찬미’ 이전 한반도 전체에 보급된 유성기는 고작 2000대 내외였다. 하지만 이 단 한 곡의 노래로 시골 구석구석까지 유성기와 레코드는 순식간에 파고들어 간다. 26년 당시 12세였던 음악평론가 고(故) 박용구의 회고담에 의하면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경북 풍기 내륙까지 ‘사의 찬미’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사의 찬미’의 선풍은 2개월 뒤 단성사에서 개봉한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과 쌍두마차를 이뤄 26년이 한국 대중문화, 혹은 문화산업의 원년임을 선포했다.

하지만 심원한 문제의식을 탁월한 영상감각으로 풀어냄으로써 단숨에 ‘민족영화’의 월계관을 쓴 ‘아리랑’과는 달리,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관현악 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제 선율에 한국어 노랫말을 붙인 ‘사의 찬미’의 예술적 완성도는 죽음의 센세이셔널리즘에 비해 매우 초라했다. 이 노래는 ‘역사적인 사건’이긴 했지만 ‘음악사적 걸작’이라고 주장하긴 어려웠다.

선율은 서구에서 빌려온 것이며, 리듬도 화성도 어설프기 그지없고, 대중음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창도 한두 번의 테이크에 끝낸 듯 불안정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 짧은 노래엔 어언 15년을 넘어가고 있던 가혹한 식민지 시대의 집단 정서를 건드리는 매혹적인 절망감이 노랫말을 통해 농밀하게 형상화돼 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대이냐’로 문을 여는 이 노래는 두 번째 절에 이르러 고양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두 번째 절의 가사는 이렇다.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고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로다….’

윤심덕 작사라고 음반에 새겨진 기록을 따른다면 동반 자살을 앞둔 이 신여성의 절망에 찬 육성은 식민지 엘리트의 불행한 자화상이면서 동시에 식민지성 그 자체의 깊고 깊은 절망을 그려낸다.

이 충격적인 스캔들은 노래와 함께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저 노랫말이 직접적으로 풍기는 지독한 염세와 체념처럼 윤심덕과 김우진은 정말 자살했을까.

이 무슨 어리석은 반문이냐고? 하지만 이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그때도, 지금도 없다. 이들의 자살은 구체적 증거 없이 언론에 의해 그냥 기정사실화됐다.

그러나 이들, 특히 우리의 여주인공이 자살할 정황만큼이나 자살이 아닌 정황, 곧 타살의 정황도 높다는 사실이 우리를 미궁으로 몰고 간다. ‘사의 찬미’를 낭만주의로 해석하지 말고 사실주의로 접근해 보자.

먼저 윤심덕과 김우진의 출신 성분. 목포 최고 갑부의 맏아들인 김우진과는 달리 평양 출신의 윤심덕은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윤심덕의 사회적 성공은 투철한 그의 성취동기에 따른 것으로, 일본 유학 역시 총독부 관비유학생 자격으로 다녀온 것이다. 그는 억척같이 자신의 남동생 윤기선과 여동생 윤성덕을 모두 유학 보냈는데, 윤성덕은 ‘사의 찬미’ 취입 개런티로 유학비용을 마련했지만, 남동생을 유학 보낼 때는 경성 갑부 이용문의 은밀한 도움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그는 자신의 예술, 곧 서양음악을 수용하지 못했던 식민지 사회에 절망하긴 했지만 녹음을 앞두고 성악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 유학가고 싶다는 희망도 피력한 것으로 보아 자살을 감행할 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윤심덕의 억척같은 생명력에 기초한 퍼스낼리티가 첫 번째 반증이라면 두 번째 석연찮은 점은 바로 그와 계약한 닛토 레코드사다. 음반 시장도 성숙되지 않았고 대중적인 음악 장르도 노래하지 않겠다는 이 늙은(?) 성악가에게 닛토 레코드사는 여동생의 미국 유학자금에 해당하는 거금을 흔쾌히 지불했다. 같은 음반 뒷면에 수록된 ‘부활의 기쁨’ 같은 찬송가, ‘매기의 추억’ 같은 낯선 서양의 노래가 식민지의 음반 시장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믿었단 말인가.

‘사의 찬미’도 미궁이다. 본래 녹음 계약에는 이 노래가 없었다. 경성에서 맺은 본래 계약서엔 없던 노래가 이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난 뒤엔 가장 먼저 음반으로 나와 시장을 강타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뭔가 이상한, 서늘한 느낌이 엄습하지 않는가.

스릴러 영화의 법칙대로라면 모든 미궁의 죽음은 그 죽음을 통해 가장 이익을 본 자를 의심하면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들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자는 누구인가. 닛토 레코드사? 아니다. 이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이는 하드웨어 회사인 일본 축음기 회사들이다. 윤심덕 신드롬으로 열린 유성기 시장은 30년대 중반에 이르면 물경 35만대의 유성기가 한반도에 보급될 만큼 성장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음반을 만든 닛토 레코드사가 바로 이 축음기 회사의 자회사라는 사실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일본의 자본은 한 남녀의 죽음만으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두 시장을 개척한 셈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죄 없는 조선인들을 백주에 학살한 것이 고작 3년 전인 23년이었다. 이 죽음이 만약 (정말 만약이다) 공황을 앞둔 일본 자본주의의 출구를 식민지를 통해 열기 위해 쓰인 시나리오에 의한 타살이라면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역사의 자궁 속에서 탄생한 것이 된다.

이들의 타살설, 혹은 돈을 받고 외국으로 달아났다는 비밀계약설이 이미 그 당시부터 알게 모르게 유포됐다는 것은 당시 식민지 대중도 이들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자살했는지 혹은 타살 당했는지 혹은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현해탄도 침묵 중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식민지 여성 엘리트의 에로틱한 희생제를 통해서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발진하였다는 사실이다.

<강헌 음악평론가>

필자 강헌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조용필이 가요계를 평정할 즈음인 80년대 초반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나왔고 서울대 음악대학원에서 음악 이론을 공부했다. 91년 가수 김현식에 대한 평론을 쓰면서 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평론가였고 공연기획자였다. 저서로는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전복과 반전의 순간’ 등이 있다. 최근엔 가수 신해철의 삶과 음악 세계를 다룬 신간 ‘신해철’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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