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 만행·소떼 방북… 대립·대화 이어졌던 ‘판문점’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에서 바라본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T1)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 소회의실(T3·왼쪽부터). 정면에 북측 판문각이 보인다. 판문점=이병주 기자
 
1976년 8월 판문점에서 벌어졌던 도끼만행사건. 국민일보DB




판문점은 65년 동안 남북 대결과 대화가 이어졌던 공간이다. ‘도끼만행사건’을 비롯한 물리적 충돌도 있었지만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 방북’ 등 남북 화해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판문점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6·25전쟁 정전협정을 논의하는 장소로 출발했다. 협정 체결 2년 전인 51년 유엔군과 북한군이 천막을 치고 처음으로 접촉했다.

판문점에선 남북 간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76년 8월 18일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인근에서 발생한 도끼만행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 초소를 가린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갑자기 작업 중단을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끼를 휘둘러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했다. 미군은 사흘 뒤 미루나무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폴 버니언’ 작전을 벌였는데, 당시 공수부대에서 복무하던 문재인 대통령이 이 작전에 투입됐다. 이 사건은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뻔했지만 김일성 주석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면서 일단락됐다. 다만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폐쇄됐고 공동경비구역(JSA) 내에 군사분계선(MDL)이 그어지는 계기가 됐다.

84년 11월에도 총격전이 발생했다. 소련인 관광안내원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탈출했다. 이를 추격한 북한군과 유엔군이 교전을 벌여 한국군 1명과 북한군 3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11월엔 북한군 병사 오청성이 판문점을 통해 남측으로 귀순했다.

충돌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남북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철조망 없이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공간이라 대화의 장소로도 자주 이용됐다. 71년 남북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362차례의 남북 대화가 판문점에서 이뤄졌다. 89년 8월에는 북한을 방문했던 대학생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을 걸어서 귀환했다.

98년 6월에는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그의 방북은 남북 경제협력과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개최의 주춧돌이 됐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사진=이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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