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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건강] “엄마, 이제 혈당체크 어떡해?”… 혈당시험지 수입중단 ‘비상’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당원병 환아 민형(가명)이가 지난 18일 엄마와 혈당 측정을 하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당원병 환자의 혈당 체크에 최적화된 다국적 기업의 혈당계.
 
소아당뇨병 환우회 김미영 대표가 희귀병 환자의 자가 사용 의료기기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김 대표는 국내 허가받지 않은 연속혈당측정기를 구입·개조한 혐의로 고발돼 최근 검찰에 송치됐다. 소아당뇨병 환우회 제공
 
소아당뇨병 환자와 가족, 치료 의사들이 김씨의 선처를 호소하며 청와대에 보낸 탄원서들. 소아당뇨병 환우회 제공


저혈당 측정에 최적화된 다국적 기업 혈당계 제품 정식 판매 안돼 대부분 직구로
앞으론 소모품 혈당 시험지도 해외서 구해다 써야할 상황
희귀병 치료 의료기기 허가없이 개인적으로 구입 땐 법에 저촉
소아당뇨병 환우회 대표 혈당측정기 구입했다 檢에 송치… 의료기기 관련 법 정비 절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민형(가명·8)이는 학교 대신 병원에서 한 달 넘게 생활하고 있다. 학교는 1주일만 나갔다. 6년 전 진단받은 희귀·난치병 치료를 위해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급히 입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형이가 앓고 있는 '당원병'은 국내 환자가 100명 안 팎에 불과하다. 유전자 돌연변이로 체내 특정 효소가 결핍돼 나타나는 대사질환이다.

정상인의 경우 음식 섭취 후 혈액 안에 생기는 ‘잉여 포도당’이 글리코겐(당원) 형태로 간과 근육에 저장된다. 몸이 필요로 할 때면 포도당으로 전환돼 에너지로 쓰인다. 당원병은 이 글리코겐이 포도당으로 바뀌지 않고 계속 간과 근육에 쌓여 각종 2차 문제를 일으킨다. 식후 2시간 안에 혈당이 급격히 소진돼 저혈당에 빠지기 쉽다. 정상인이나 당뇨 환자들에게 볼 수 있는 정도의 저혈당이 아니다. 70㎎/㎗ 이상 유지돼야 할 혈당이 10∼20㎎/㎗까지 뚝 떨어져 급성쇼크가 일어나고 호흡곤란, 뇌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루에도 수차례 이런 치명적 위험에 처해진다. 수시로 혈당을 체크해야 하며 엄격한 식이요법도 필수다.

특히 혈당 측정은 저혈당 상태를 막는 생명 경고등이나 마찬가지다. 민형이 엄마 김모(40·경기도 성남)씨는 23일 “낮에는 아이 활동량이 많아 3∼4시간마다 혈당을 재고 밤에는 공복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잠자는 아이를 수시로 깨워 혈당 체크를 해야 한다”면서 “혈당치에 따라 탄수화물 공급원인 특수 전분(생옥수수가루) 먹이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밤낮 없이 매일 혈당과의 전쟁”이라며 고충을 털어놨다.

당원병 아이들, 혈당 체크 어쩌나

당원병 환자와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하는 일이 최근 불거졌다. 저혈당 측정에 최적화돼 전 세계 당원병 환자들에게 사용이 권고되는 다국적 기업의 혈당계 제품(미국 애보트사의 프리스타일라이트)은 국내에 정식 판매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환자들은 해당 혈당계를 해외 직구(인터넷을 통해 해외에서 직접 구입)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있다. 혈당 측정 때마다 교체해야 하는 필수 소모품인 혈당 시험지(test strip)는 국내 지사를 통해 구입이 가능했다.

그런데 앞으로 이 혈당 시험지마저 해외에서 구해 써야 할 처지다. 해당 기업이 시장성을 이유로 혈당 시험지의 국내 수입·판매를 이달 안에 중단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국내 회사 제품과는 호환이 안 돼 대체품도 없는 상황이다. 주로 신생아 때 발병해 아이들이 대부분인 당원병 환자의 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2년 전 해당 제품을 해외 직구한 김씨는 “국내 혈당계 제품 3∼4개를 써 봤지만 대부분 당뇨병 환자의 고혈당 관리에 적합한 것들”이라며 “아침 공복 혹은 식후 혈당 정도만 체크하면 되는 당뇨병과 달리 당원병은 더 자주 혈당을 체크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국내 제품별로 혈당치 오차가 20㎎/㎗ 이상 발생하고 같은 혈액을 같은 혈당계로 재도 매번 수치에 차이가 나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정확한 혈당 측정치를 바탕으로 시간에 맞춰 특수 전분을 먹이고 음식 조절을 하지 않으면 곧바로 응급 상황이 닥칠 수 있는 환아 부모 입장에서 국내 제품은 무용지물인 셈이다.

혈당 시험지는 모두 12종인 당원병 유형에 따라 소요량이 다르지만 월 평균 2∼3박스(박스당 50개)가 쓰이고 비용은 4만∼6만원이 든다. 일부 유형의 당원병 환자들은 혈당 외에 혈액 내 케톤이나 젖산, 요산 수치도 필수적으로 함께 관찰해야 하는데 여기에 사용되는 측정 시험지는 혈당 시험지보다 훨씬 비싸다.

당원병환우회 조은정 대표는 “다행히 혈액 내 다른 수치 측정 시험지는 국내 공급이 끊기지 않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당원병 환자들의 소모품 구입 비용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이른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 혈당 시험지를 해외 직구하면 비용은 더 많이 들고 구입 절차도 까다로워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원병은 유전질환이라 한 가구에 여러 자녀가 환자인 곳도 있다. 이 경우 소모품 구입비용은 배로 늘어난다. 당원병 쌍둥이 아들(6)을 키우는 엄마 차모(39·경북 경주)씨는 “얼마 전 혈당 시험지 판매 회사에서 더 이상 수입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는 10월이면 재고품이 소진된다는데 유통기한 때문에 사재기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울먹였다.

조 대표는 “당뇨병처럼 혈당 관리가 중요하지만 희귀병이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원병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당뇨병보다 미흡하다”며 “당원병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혈당계와 각종 소모품이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고 건강보험 혜택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당원병 환자와 가족들은 지난달 14일부터 한 달간 정부 지원을 촉구하며 청와대 국민신문고에 청원해 모두 2350명의 동의를 얻었다.

당원병처럼 저혈당 관리가 아주 중요한 고(高)인슐린혈증 환자들도 처지가 비슷하다. 고인슐린혈증은 신생아 5만명당 1명꼴로 발병하는 희귀질환이다. 췌장에서 혈당조절 호르몬인 인슐린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돼 지속적으로 저혈당에 빠지는 병이다. 많은 환자들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하루 10차례 이상 혈당 체크를 해야 하는데, 역시 국내에 들어와 있지 않은 연속 혈당측정기(애보트사의 리브레)를 해외 직구해 사용한다. 연속혈당측정기는 혈액을 얻기 위해 손을 찌를 필요 없이 5분마다 혈당을 자동 체크해 주는 장비다. 혈당 시험지 수입·판매가 조만간 중단되면 사용에 큰 애로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고인슐린혈증을 앓는 생후 38개월 아들을 둔 엄마 조모(39·경기도 화성)씨는 “지난 1월 연속혈당측정기를 사용한 뒤부터 저혈당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 외출에도 자신감이 생겼고 새벽에 좀 더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됐다”면서 “혈당 시험지 구입이 어려워지면 다시 힘들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법률 심판대 선 모정과 선의

더 큰 문제는 희귀·난치병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이런 의료기기와 소모성 치료 재료를 허가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외에서 구입해 사용하는 행위가 현행법에 저촉돼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을 환자와 가족들은 잘 알지 못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해외에 눈을 돌렸다가 자칫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소아당뇨병환우회 대표 김미영(42)씨는 최근 소아당뇨병(1형 당뇨병)을 앓는 열 살 아들과 다른 환우들을 위해 국내 시판 허가를 받지 않은 연속혈당측정기(미국 덱스컴사의 G4)를 구입·개조했다가 의료기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식품의약품 당국은 ‘누구든 허가 없이 의료기기를 수입해 판매·제조하면 안 된다’는 의료기기법 규정을 내세워 지난달 초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김씨를 송치했다. 난치병 자녀와 동료 환자 치료를 도우려던 모정과 선의가 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소아당뇨병 환자와 가족, 치료 의사 등은 김씨가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해 들여온 게 아니어서 위법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선처 탄원서를 검찰과 청와대에 보냈다.

김씨 사건을 계기로 열린 국회 토론회에선 개별 수입 의료기기의 사용 절차에 관한 규정이 별도로 마련돼 있지 않은 현행 의료기기법의 개선·보완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치료 재료를 포함해 희귀병 환자에게 꼭 필요하고 도입이 시급한 의료기기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국내 허가되지 않은 의료기기의 경우 자가(自家)사용 허가 제도와 수입 통관 절차를 간소화하겠다고 했다.

근본적 해결을 위해 법·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희귀 의약품의 경우 1999년 개원한 식약처 산하 희귀·필수의약품센터가 관련 정보 제공과 약품 공급을 위한 수입 업무를 대행해 주고 있지만 의료기기의 경우 그런 시스템이 없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약사법 규정을 개정해 희귀·필수의약품센터의 업무 범위를 의료기기의 정보 제공 및 공급을 위한 수입 업무 대행까지로 확대하면 환자들이 직접 구매하고 통관 절차를 밟아야 하는 불편과 비용 및 접근성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제언했다. 또 “희귀·필수의약품센터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의료기기정보기술지원센터’(6월부터 의료기기안전정보원으로 명칭 변경)에 관련 업무를 수행토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비슷한 취지로 희귀·난치성 질환 자가 사용 의료기기를 국가가 주도해 공급할 수 있게 하는 의료기기법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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