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나쁘니까 흥미로운 요지경의 나날들


 
(1)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익현(최민식)은 뇌물을 바친 고위직의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수첩을 흔들며 “이게 10억짜리 전화번호부”라고 과시한다. 영화사 제공
 
(2)최익현은 최형배(하정우)의 조직에 들어가 속칭 ‘반달’(건달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반건달) 생활을 시작한다. 영화사 제공
 
(3)영화의 포스터. 영화사 제공 (4)제6공화국 대통령 노태우. 그는 1990년 10월 13일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검찰총장은 김기춘이었다. 대통령기록관
 
윤종빈 감독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에는 예상과 다르게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은 등장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악인인데 악인이라는 이미지를 뚜렷하게 부여받는 인물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등장인물들 중 누구의 행위가 더 악한 것인지 차등하고 선별하는 것에 의식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보다는 그들이 대개 비슷비슷한 한통속으로 묶여 있는 요지경 세상의 생활형 인물들로 보이도록 만드는 데 주력한다. 이런 요지경 세상 속에 흥미로운 인물과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는 것이 ‘범죄와의 전쟁’의 기본적인 호기심이다.

물론 실제의 그 시대는 엄혹했다. 1990년 10월 4일 보안사령부 소속 윤석양 이병이 탈영해 기자회견을 자청하는데, 내용은 보안사의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 기록을 고발하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2009년 작 영화 ‘모비딕’의 소재가 되었다). 야당, 시민단체,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던 무렵인 10월 13일, 대통령 노태우가 돌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정국 전환용 홍보성 문구에 불과한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실행되었고 소란스러운 시기를 지났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전시적 공안 정치의 일환으로 변질돼 가며 그 실효성을 의심받았다.

‘범죄와의 전쟁’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부산의 거대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로 지목된 최익현(최민식)도 잡혀 들어와 조범석(곽도원) 검사에게 조사를 받는 중이다.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부산 세관의 하급 공무원이었던 최익현이 최형배(하정우)가 이끄는 폭력 조직의 상위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최형배와 갈등 관계가 되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8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최익현의 범죄 전성시대에 관한 연대기를 그려낸다.

영화는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고 비평 면에서도 비교적 호평을 얻었다. 심지어 영화 속 “살아 있네!”라는 대사는 대중적 유행어로까지 등극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유행어를 넘어 어딘가 흥미로운 데가 있다.

깡패 최형배가 다방 여직원의 몸매를 품평하며 그 말을 던질 때 그건 육체의 탄력성을 묘사하는 저질스럽고 천박한 용어다. 최익현이 사우나장에서 건설업자를 앞에 두고 식혜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최형배를 흉내 내듯이 같은 말을 뱉을 때 그건 이제 자신이 갖게 된 세력을 뽐내려는 과장된 거만함이다. 그리고 상대 조직의 우두머리 김판호(조진웅)가 최익현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며 “최 사장님하고 나하고 함께하면, 이거 살아 있는데”라고 말할 때의 그것은 은밀하고 위력적인 결탁의 힘이 가져올 이상형을 상상해 보라는 유혹적 꼬드김이다.

외국어로는 제대로 된 번역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이 표현은 때마다 조금씩 뜻과 사용법이 달라서 포괄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한 가지 공통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다름 아니라 ‘나쁜 놈들’의 공통어이자 은어라는 점이다. 이것은 한 집단의 가장 대표적인 언어이며 소속의 인장이다. 뭔가 탄력성과 생동성, 역동성을 묘사하기 위해 그들끼리 공용하는 전문적이면서도 선정적인 문구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야 할 것 같다. “살아 있네”라는 유행어에 비해 전혀 주목 받지 못했으나 실상 그에 호응되고 있거나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말이 이 영화에는 곧잘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재밌네”라는 표현이다.

술집에서 최익현이 전 직장의 상사에게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단초는 상대가 최익현을 “재밌는 친구”라고 호명해서다. 이때 재밌다는 것을 최익현은 우습고 하찮다는 무시의 표현으로 들었을 것이다. 한편 조범석 검사는 최익현을 두고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 놈이네”라고 말한다. 이때의 ‘재밌다’는, 비상식적인 행동이 하도 다양하고 특이해서 역정이 나지만 하여튼 괴상한 관심이 간다는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이 표현은 훗날 최익현의 아들이 검사가 되었을 때 그가 최익현의 아들인 줄 모르고 내뱉게 되는 조범석의 묘사 속에서 한 번 더 반복되는데, 조범석은 “요즘 검사 재미없는데? 아무튼 재밌는 친구네”라고 반응한다. 요즘 검사가 재미없는 건 나쁜 짓을 포함해 예전처럼 마음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하겠다는 저 친구는 의외의 인물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재밌네”라는 표현도 “살아 있네”라는 표현만큼이나 포괄적인 용법으로 매번 다르게 쓰이지만, 역시 여기에도 한 가지 정체성은 있다. 이 표현은 오직 최익현과 그의 혈통(아들)의 어떤 성격을 가리킬 때에만 주의 깊게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살아 있네”가 폭력배들의 과시적 은어라면, “재밌네”는 최익현과 그의 일가의 성격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공유하게 된 묘사적 은어다.

흥미롭게도 ‘범죄와의 전쟁’ 스스로가 성취하고 싶어 하는 일종의 영화적 상태가 위와 유사한 ‘살아 있음과 재미있음’에 닿아 있다. 이 영화는 다소 천박함을 끌어안는다 하더라도 모종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드러내는 활력의 대중문화적 은어가 되고 싶어 한다. 한편으론 비도덕적이고 어처구니없는 범죄의 연쇄로 기묘한 생존을 이어가는 최익현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다채로움과 의외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영화 자신도 그러한 다채로움과 의외성을 보유한 재미있는 녀석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다름 아니라 당대 나쁜 놈들의 모든 것들, 하지만 흥미롭게 얘기될 만한 것들, 그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부정과 낙후의 흔적들을 향수와 함께 끌어 모아 조직하는 것이다. 이제는 얼마간 전설적이고 장르적인 인물들로 분화해버린 지역 폭력배들의 생활상과 외양들, 뿌리 깊은 유교적 남성성으로 얼룩져 사돈의 팔촌까지 “우리 집안사람”으로 감싸고 챙겨 주면서 일어나게 되는 종친회 문화의 해프닝, 술집에서 정책과 법이 집행되고 안기부가 파친코 사업을 주관하는 비상식이 횡행하는 정치세태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최익현의 감탄에 가득 찬, 하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그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언사를 통해 한 시대의 초상으로 요약된다.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시대고!”

이러한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중심에 최익현이 있는 것이므로 이 시대의 흐름이란 최익현 개인의 삶의 부침과 격차, 고저, 상승, 추락 등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위기의 순간마다 상대를 바꾸고 상황을 모면해가는 그의 인생사가 곧 이 시대를 표상하는 작은 역사다. 따라서 잘 주목되진 않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학적 장점도 장면 하나하나의 밀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혹은 가장 큰 장점이라 지적돼 온 캐릭터들의 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익현 인생사의 다양한 ‘전환과 변환’의 나날들이 발생하는 그 대목들에서의 표상과 리듬에 있다.

예가 될 만한 다수의 장면이 있지만 여기서는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두 개의 대표적인 대목만 보도록 하자. 술집에서 자신을 우롱한 전 직장 상사를 흠씬 두들겨 패고 나서 최익현이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순간에 동원되는 슬로우 모션은 ‘범죄와의 전쟁’의 감독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의 그 유명한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주목되는 것은 폭력 이후 문득 카메라가 몇 초간 머무를 때 어딘가 어색하고 무안하게 서 있는 최익현의 몸짓과 얼굴이다. 그러나 그 어색함과 무안함은 잠시. 최익현은 이제부터 권력 상승의 길을 걷는다.

나이트클럽에서 최익현이 최형배의 아끼는 수하인 박창우를 폭행한 뒤 최형배와 불편한 심기를 나누게 되는 장면은 마침내 최익현이 권력의 왕좌에서 축출당하기 직전 찾아드는 전환적 대목이다. 이때 이 장면의 마지막에서 최익현은 우리가 상술한 영화 초반부 저 술집 장면에서의 그것과 유사한 몸짓과 표정을 다시금 짓게 된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반대다. 그는 이제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화는 파란만장한 최익현의 삶의 길을 숨 가쁘게 오고 간 뒤 마침내 오랜 시간을 건너 뛰어 마지막 장면에 다다른다. 손주의 돌잔치에 백발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2012년 최익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최익현 쪽으로 카메라가 다가가면 화면 밖에서 불현듯 최형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부님!” 최형배가 최익현을 부르던 호칭이다. 최익현이 돌아보면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묻고 싶어 한다. 최형배는 형기를 마치고 복수를 위해 최익현을 찾고 만 것인가. 아니면 복수가 아니라 또 다른 협상의 국면이 둘 사이에서 열리진 않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음성은 최익현이 불러들인 망상일 뿐인가 혹은 시간을 건너 그를 재방문한 망령인 것인가. 분명한 건 이것이다.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 윤종빈 감독은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 큰 호응… 첩보물 ‘공작’ 개봉 앞둬


부산에서 나고 자란 윤종빈(39·사진) 감독은 중앙대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단편 ‘남성의 증명’으로 2004년 미장센 단편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했고, 장편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2005)를 만들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일명 관심사병을 중심으로 한 군대 내 폭력의 문제를 기민하게 포착한 영화였다. 윤 감독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화제를 낳았다. 상대역은 중앙대 연극영화과 동문이자 당시에는 신인 배우였던 하정우가 맡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개인 작업 내지는 독립영화의 형태였다면 두 번째 장편 ‘비스티 보이즈’(2008)는 충무로 입성작에 가까웠다. 호스티스 바에서 일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하지만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윤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로 흥행 몰이를 하고 비평적으로도 관심을 받으며 충무로의 젊고 주요한 감독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장률의 ‘춘몽’(2016)을 비롯해 영화에 틈틈이 조·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이후 새롭게 주력하게 된 건 제작이다.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제작을 맡았고 ‘검사외전’(2016) 제작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 등이 출연하는 첩보물 ‘공작’을 연출했다. 올해 개봉 예정인 이 작품은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됐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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