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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테바는 스파이였다”… 유럽 지식사회 발칵



현대철학 거장·페미니즘 이론가 크리스테바 佛서 ‘사비나’ 암호명으로 활동
푹스·블런트, 소련에 정보 넘겨… 월트 디즈니는 FBI 비밀 첩보원
동화작가 달, 美 염탐한 英 요원… 미모의 채프먼은 러시아 ‘본드걸’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다.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등 20세기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문학비평과 심리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고 ‘사랑의 역사’ ‘공포의 권력’ 등 30권 이상 저서를 냈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의 선구자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학계의 존경을 받는 어른이다. 그러나 그에겐 오랜 시간 감춰온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다름 아닌 구 동구권의 스파이 ‘사비나’.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장 줄리아 크리스테바(76) 파리 제7대학 명예교수가 과거 고국 불가리아의 스파이로 일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주간 르누벨옵세바퇴르는 불가리아 정부 문서를 입수해 28일(현지시간) 이같이 보도했다. 크리스테바가 최근 불가리아 문학비평지에서 일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제출하면서 과거 행적이 드러났다는 설명이다.

정부 문서에 따르면 크리스테바는 불가리아 국가보안위원회(CSS)를 위해 일했다. CSS는 구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와도 긴밀하게 협조했던 동구권의 대표적인 정보기관이다. 문서에는 크리스테바가 1971년부터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적혔다. 크리스테바는 65년 프랑스 정부가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이주했었다. 언제까지 활동이 지속됐는지, 불가리아 정부로부터 보상이나 대가를 받았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르누벨옵세바퇴르는 2015년 발간된 로랑 비네의 역사추리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에 크리스테바가 등장하는 것을 거론하며 과연 우연의 일치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에는 롤랑 바르트를 살해한 것으로 의심되는 불가리아 스파이가 등장한다.

이런 의혹 제기에 크리스테바는 성명에서 “기괴하고 거짓된 비방”이라며 “나를 해치려는 누군가가 꾸민 짓”이라고 보도를 부인했다.

과거에도 서구 학계 인사가 스파이로 밝혀진 사례가 있었다. 이론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1911∼88)는 미국의 원자폭탄 설계도를 훔쳐 소련에 넘긴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 기술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원폭 개발에 참여한 그는 1940년대 초부터 소련과 접선해 정보를 넘겼다. 소련이 덕분에 원폭 실험에 성공한 1949년 푹스는 미 정보당국에 붙잡혀 9년형을 살았다.

영국의 예술사학자 앤서니 블런트(1907∼83)도 유명한 ‘스파이 학자’였다. 영국 런던대 교수로 프랑스 바로크 시대 미술연구에 혁혁한 공을 세워 영국 왕실에서 기사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다. 그가 쓴 ‘1500∼1700년대 프랑스 예술과 건축’은 학계에서 손꼽히는 명저다. 그러나 그는 1930∼50년대 소련 첩보기관의 영국 내 조직인 ‘케임브리지 파이브’ 소속으로 일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인 1979년에 이르러 정부에 자수했던 게 뒤늦게 알려지며 기사 작위를 박탈당했다.

세계 어린이들의 ‘꿈의 공장’으로 일컫는 디즈니의 설립자 월트 디즈니(1901∼66) 역시 스파이였다. 디즈니는 1940년부터 미 연방수사국(FBI) 로스앤젤레스 지부의 비밀 첩보원으로 일했던 사실이 정보공개법에 따라 1993년 밝혀지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디즈니는 회사 직원들 중 공산주의자를 가려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FBI에 넘겼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동화작가 로알드 달(1916∼90)은 미국을 염탐한 영국의 비밀요원이었다. 주간 ‘타임’ 발행인의 아내이자 공화당 하원의원이었던 클레어 부스 루스를 포함해 미국 사교계의 귀부인들과 내연 관계를 맺으며 정보를 캐냈다.

유명인 스파이는 연예계에도 많았다. 60, 70년대 미국의 스타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1912∼2004)도 뒤늦게 스파이였던 게 밝혀졌다. 차일드는 TV에 출연하기 전인 2차 대전 시기 미 해군 전략사무국(OSS) 소속으로 중국이나 스리랑카 등지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명가수 프랭크 시나트라(1915∼98) 역시 스파이 설이 유력하다. 그의 딸 티나에 따르면 시나트라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요청을 수차례 들어줬다. 개인 제트기 등으로 전 세계를 공연차 돌아다녔던 그는 CIA가 비밀리에 수송해줬으면 하는 인물들을 실어 나른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에는 스파이 사실이 발각된 뒤 TV스타가 된 경우도 있다. 뉴욕에서 온라인 부동산업체를 운영하던 러시아 출신 여성 애나 채프먼(36·본명 애나 쿠슈첸코)은 돋보이는 외모로 뉴욕 사교계를 섭렵하며 정보를 수집해 고국에 넘겼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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