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삶과 죽음의 연속성, 작은 조각 통해 구현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37년 어머니를 모델로 그린 ‘예술가 어머니’. 이 작품엔 남편을 잃고 딸마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한 여인의 아픔이 담겨 있다. 필자 제공
 
자코메티가 1930년대와 40년대에 완성한 1∼3㎝ 크기의 작은 조각상 중 하나.
 
자코메티가 작은 조각상을 만들 때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이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상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여동생 오틸라의 죽음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193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고국인 스위스로 돌아와 남은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전까지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지냈었다. 당시 그는 많은 모델들과 사귀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었다. 스위스로 돌아올 때 그의 예술적 영감은 고갈된 상태였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어머니 아네타와 여동생 오틸라가 그의 모델이 돼 주었다. 오틸라는 아버지의 성격을 빼닮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항상 친절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오틸라는 33년에 결혼한 뒤 자식을 낳으려고 노력했다. 자코메티 가문의 부흥은 오틸라의 출산에 달려 있었다. 그녀는 37년 10월 10일 실비오 베르투드라는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가족들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들떴지만 곧바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오틸라가 출산합병증으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자코메티를 마비시켰다. 그는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사후의 세계를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그는 ‘보이지 않는 물건’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조각은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준 반전의 선물이었다.

4년 후인 37년, 여동생 오틸라의 죽음은 자코메티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아이의 출산과 산모의 사망은 같은 날 일어났다. 자코메티는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코메티의 생일이기도 한 10월 10일은 그의 대부이자 화가인 퀴노 아미에의 아이가 사산아로 태어난 날이었고, 동생 오틸라가 죽은 날이었으며, 조카 실비오가 태어난 날이었다.

자코메티는 오틸라가 죽기 전, 자신의 손을 그녀의 배에 올려놓고 아이의 심장 소리를 느끼곤 했다. 자코메티는 조카의 탄생이 여동생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자코메티는 오틸라의 죽음을 기리면서 특이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오틸라를 상징하는 아주 작은 형상들을 만든 뒤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행위를 37년부터 43년까지 반복했다. 이 작업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가 완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코메티는 스위스에서 어머니를 그렸다. ‘예술가 어머니’라는 작품이다. 풍성한 백발의 어머니는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다.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아들을 응시하고 있다. 어머니의 모습은 캔버스 중앙에 있지 않다.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그녀의 얼굴은 수많은 붓질로 표현돼 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질곡의 세월이 담긴 얼굴이다.

얼굴에서는 거의 살을 찾아볼 수 없다. 해골과 유사하다. 어머니는 4년 전 남편을 잃었고, 한 달 전엔 딸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녀의 다문 입은 전체적으로 앞으로 돌출돼 있다. 마치 슬픔을 참아내면서 떨고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황토색이 칠해진 나무문 앞에 앉아 있다. 이곳은 자코메티가 살았던 스위스 집의 거실이다.

그림에 담긴 문은 고대 이집트 납골당에 있던 ‘위문’처럼 넘어갈 수 없는 금지의 문이다. 죽은 자에게만 허용되는 문이다. 어머니는 그 문을 통과해 저세상으로 영원히 가버린 남편과 딸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이 그녀에게서 느껴진다.

당시 어머니 나이는 68세였다.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그녀의 배가 불러 있다는 점이다. 이런 배는 그녀가 임신했거나 혹은 비만이란 점을 의미한다. 자코메티가 어머니의 배를 불룩하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의 부른 배는 오틸라의 임신을 상징한다. 혹은 어머니가 오틸라를 임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코메티는 어머니의 체격을 남성적으로 표현했다.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자코메티에게 어머니는 집안의 경제적·정신적인 기둥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당당했었다. 하지만 남편과 딸을 잃자 어머니는 완전히 무너졌다. 어머니는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뒤 치아를 모두 잃었다.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했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인생의 신비를 표현해냈다.

조그만 형상들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와 작별한 뒤 상징이 아닌 실재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틸라의 죽음을 목격한 뒤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작은 조각을 통해 구현해내곤 했다. 이 당시 그가 작업한 조각의 머리와 몸의 크기는 너무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자코메티는 이 시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더 이상 대상의 실제 모습과 크기를 알 수 없다. 나는 어느 것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조각은 점점 작아졌다. 자코메티가 이런 작품들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일단 자코메티가 당시 가깝게 지냈던 여인들과 결별했음을 의미한다. 자코메티는 자신을 떠나가 버린 여인들과, 삶과 죽음의 교묘한 교차를 알려준 오틸라를 통해 자신과 여성들 사이에 놓인 거리를 실감했던 것 같다.

자코메티가 63년에 했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조각이 작아지기 시작한 이유가 이사벨라 델머 때문이라고 밝혔다. 델머는 당시 그가 사귄 여성 중 한 명이었다. 자코메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사랑한 여인을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싶었다. 나는 어느 날 밤에 봤던 그녀의 모습을 조각했다. 나는 그녀를 80㎝ 정도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세세한 부분들을 담을 수 없었다. 조각은 점점 작아졌고, 급기야 1㎝ 크기가 되었다.”

작은 크기의 작품을 만든 또 다른 이유는 파블로 피카소가 남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피카소는 30년대 말 자코메티와 친분을 쌓았다. 피카소는 자코메티가 남긴 작은 형상들이 파리에 있는 카페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성 소냐 모세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자코메티는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조각을 만들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자코메티는 이사벨라 델머와 소냐 모세를 통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흠모했던 이집트 조각의 완벽한 재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자코메티의 조그만 형상들은 이집트에서 출토된 여인 형상의 조각과 유사하다. 이 조각은 죽은 자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는 영혼을 의미한다.

자코메티가 37년부터 43년까지 만든 여성의 형상을 띤 조그만 크기의 작품들은 음부가 강조돼 있고 복부는 돌출돼 있다. 이때의 조각은 임신했던 오틸라를 상징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그는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가 제작했던 작은 여인상들은 간결한 형태를 보여준다. 너무 작아서 오히려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다는 게 특징이다. 자코메티는 수많은 작은 조각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20점 정도만 남아 있다. 이 형상들의 크기는 겨우 1∼3㎝ 정도다. 양팔은 몸에 붙어 있다. 눈도 없다. 외계인 같은 모습이다. 자코메티는 왜 이런 조각을 만들었을까.

조그만 형상이 거대한 단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아득히 먼 곳에서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이 저 멀리 서 있으면, 그 존재가 지닌 세세한 것들은 사라지면서 존재의 ‘전체’를 인식할 수 있다. 그 존재가 뿜는 ‘인상’을 포착할 수 있다. 자코메티는 대상이 지닌 아우라를 표현해낸 작가였다. 그는 이런 작업을 오랫동안 시도했고, 작은 형상들을 만들면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해나갔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 사회가 부여한 ‘장식’이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나를 저 멀리서 보았을 때, 나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나만의 인상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의 이상을 실현할 단이다. 단 위에서 우리가 가진 염원을 되새기면서 정진할 때 우리는 매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어제의 나’는 죽고 ‘미래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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