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대상이 뿜어내는, 죽음도 넘어서는 ‘인상’을 빚다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36년에 완성한 ‘이사벨라의 머리’. 화가 앙드레 드렝의 모델인 이사벨라 델머를 조각한 작품이다. 필자 제공
 
‘이사벨라의 머리’를 만들 때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 여인의 흉상’. 필자 제공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아버지의 죽음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 1934년과 35년은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10년 가까이 탐닉했던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탈출했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조각을 만들기 위해, 그 당시 그를 억누르던 감정들을 극복해야 했다. 33년 아버지의 죽음이 야기한 슬픔 분노 죄책감을 털어내야 했다.

아울러 초현실주의와 아방가르드 예술의 정신적인 토대였던 마술과 신비학을 버리고, 그것들을 대치할 혁신적 기반을 찾아야만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하면서 용기를 가져야하는, 과거의 끝이자 미래의 시작 지점에 서 있었다.

초현실주의는 자코메티에게 유용한 도구이자 무기였다. 초현실주의 사상은 자코메티가 아버지의 예술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자코메티의 예술세계는 반동적이긴 했지만 자생적이진 못했다.

자코메티는 33년 초현실주의 잡지에 ‘어제, 움직이는 모래’라는 글을 발표했다. 아버지를 살해하는 판타지를 시로 표현한 글이었다. 이 시가 발표된 뒤 5주 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 처참한 우연은 자코메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자책했다.

자코메티는 어릴 때부터 작품을 만들었다가 부수는 걸 반복했다. 책상의 물건들을 안정감 있으면서도 정확하게 배열하는 습관도 있었다. 이 같은 이상한 행동들은 자코메티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대방을 해치겠다는 나쁜 생각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줬다.

자코메티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달래기 위해 추상주의와 결별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예술세계인 구상주의로 돌아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묘사하는 초현실주의와도 결별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34년 여름, 자코메티는 스위스 말로야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동생 디에고와 전문적인 모델인 리타 궤피어를 모델로 삼아 두상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코메티는 모델이라는 ‘실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마음에서 요동치며 자신을 강력하게 유혹하는 초현실주의로부터는 완벽하게 탈출하지는 못했다.

자코메티는 자신을 구상예술이라는 돛대에 강제로 묶었다. 그는 파리에서 구상작업을 거의 한 적이 없었다. 고향인 스위스 스탐파와 말로야에 위치한 화실은 그에게 슬픔의 장소였다. 그는 자신의 삶의 밑바탕이 돼주었던 아버지의 예술 세계로 재진입하였다.

실제 모델을 앞에 두고 두상을 조각하면서 자코메티는 아버지를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인정하게 됐다.

자코메티는 당시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예술적인 아버지였던 초현실주의 창시자 앙드레 브레통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그는 진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탕자’였다. 34년, 브레통은 자코메티의 작품 ‘보이지 않는 물건’을 찬양하는 긴 글을 썼다. ‘공기 속 물’이라는 초현실주의 분야의 책에 그림을 넣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브레통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와 결별했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시선을 장악하는, 자신의 눈앞에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의 머리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브레통은 자코메티의 두상 작품을 보고 조소를 보냈다.

“누구나 머리가 무엇인지는 알지.”

이런 반응에 자코메티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도 인간의 얼굴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진 못했어.”

자코메티는 브레통을 떠나 야수화를 창시한 앙드레 드렝을 만난다. 드렝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고대예술을 연상시키는 고전주의 화풍을 소개하였다. 드렝은 파리 사교계의 왕자였다. 항상 아름다운 모델들과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특히 드렝의 모델이었던 이사벨라 델머와 소냐 모세는 자코메티를 매료시켰다. 자코메티는 드렝을 자주 찾아가는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파리 예술가들은 드렝의 작품은 시대에 뒤떨진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자코메티의 생각은 달랐다. 드렝은 독립적인 예술혼을 갖고 전통과 현대를 융합해내고 있었다.

36년 드렝은 전통예술을 통해 현대예술을 해석하려는 새로운 예술사들을 모았다. 프란시스 그루버, 발튀스, 피에르 탈 코아트, 그리고 자코메티였다.

이 당시 자코메티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화가 앙리 마티스의 아들이며 파리의 가장 중요한 화상인 피에르 마티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한두 가지를 공부해야했다. 나는 35년 한 모델을 보면서 그 몸 전체와 그 머리를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2주 동안 공부하였다. 그런 후 나는 구상을 이해했다. 35년부터 40년까지 모델과 함께 작업했다. 내가 상상한대로 만들어진 것은 없었다. 그 머리는 나에게 도저히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크기도 알 수 없었다. 나는 1년에 두 번 두상을 조각했다. 항상 같은 것을 끊임없이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마주치는 사물이나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특정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은 어머니의 얼굴 냄새 목소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식한다. 어린이는 서너 살이 되기 전에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어머니의 독특한 이미지를 그려내곤 한다.

자코메티는 구상 작업을 시작하면서, 기억의 본질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기억은 왜곡되거나 뭔가 부족할 때가 많았다. “기억은 짧다. 그것은 복잡하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수록, 나는 기억하는 것이 없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모델을 보면 볼수록 자신과 대상 사이에 통과할 수 없는 막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말한다. “모델을 보면 볼수록 내가 응시하는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모델과 나 사이에 너무 많은 조각들이 존재한다. 내가 본 것을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자코메티는 자신이 조각하려는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 대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신비’는 그 대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조각은 그 대상이 뿜어내는 어떤 것을 조각가가 수용한 것이다.

그 대상에 대한 희미한 직관이 조각의 기본 재료인 셈이다. 대상을 응시하지만, 그 대상이 주는 정보가 잘못되었다면, 예술가는 무엇을 창작해야하는가?

자코메티는 이집트 예술 작품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이집트 예술이 3000년 넘는 시간을 견디며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지닌 특별한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집트 조각은 생명이 없는 돌덩이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을 조각상에 옷을 입하고 음식을 주는 의례를 통해, 조각에 담긴 존재의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인들은 인간의 특별한 구성 요소를 ‘카’라고 불렀다. ‘카’는 흔히 영혼으로 번역되나 오히려 어떤 존재가 지니는, 죽음을 넘어서는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 예술가들은 대상의 정신적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에게 조각상을 만드는 작업은 그 대상을 영원히 존재하게 만드는 거룩한 의식이었다.

이집트 여인의 흉상

‘이집트 여인의 흉상’은 정면을 응시한다. 그녀는 죽음 후의 영원한 세계 안으로 이미 진입해 속세에 있는 우리를 보고 있다. 자코메티는 기원전 14세기 소위 이집트 ‘아마르나 시대’ 조각상들에 매료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집트 예술에 심취하였고,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고갈된 시기에 다시 이집트 예술로 돌아가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그는 이집트 흉상과 같은 작품을 36년에 만들기 시작했다. 드렝의 매력적인 모델이었던 이사벨라와 사랑에 빠져 그녀의 두상을 조각했다.

자코메티는 36년 ‘이사벨라의 머리’를 완성한다. 이집트 조각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작품 속 그녀는 고대 이집트 여인과 비슷하다. 머리 모양이나 눈이 그렇다.

자코메티는 이사벨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준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석고로 표현하였다. 자코메티는 전작인 ‘매달린 공’이나 ‘보이지 않는 물건’에서 시도한 ‘알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자코메티는 응시하는 대상이 내뿜는 인상,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아우라를 조각이라는 예술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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