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를 악물고 달리는 노인

최승호 시인




국민일보 창간 30주년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을 관람한 최승호(64·사진) 시인이 13일 미발표 자작시를 보내왔다. 20대에 자코메티 작품을 처음 봤다는 그는 감동을 잊지 못하고 헌사를 바치듯 대표작 시선집 제목을 ‘자코메티와 늙은 마네킹’(2008)으로 작명한 바 있다. 그는 말한다. “자코메티의 조각은 본질만 남겨두고 군더더기를 모두 없애 한없이 앙상해진다. 내 시도 그런 앙상함 같은 거”라고.

최 시인은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대설주의보’ ‘고비’ ‘아메바’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 등을 냈다. 오늘의작가상,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숭실대학교 예술창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노인

바람 부는 날 탄천에서
이를 악물고 달리는 노인을 본다
가느다란 다리
앙상한 팔 끝에 불끈 쥔 주먹

바람을 가르며 노인이 달린다
이마의 땀을 주먹으로 훔치고
가느다란 발로 땅을 차면서

노인은
먼 길을 걸어오고
먼 길을 달려온 사람이다
태양의 주위를 팔십 바퀴쯤 돌아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아득히 먼 길 끝에 소실점처럼
아주 조그만 미라처럼 꼬마가 서 있다

먼 길 위에서의 기억들
길 위에서 흩어지는 이삭 같은 기억들
노인이 다시 달린다
이마의 땀을 주먹으로 훔치고
가느다란 발로 땅을 차면서
이를 악물고 달리는 노인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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