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전쟁을 제거한 전쟁동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로 분한 강혜정의 연기에는 한국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독특함이 있었다(위 사진). 수류탄이 곳간에서 터지자, 팝콘이 된 옥수수들이 하늘에서 눈처럼 흩어진다(아래). 영화사 제공
 
동막골의 평화로운 풍경. 영화사 제공
 
국군 인민군 미군이 군복을 벗고 마을 주민들의 옷을 입으며 하나가 된다. 영화사 제공
 
박광현 감독


6·25 전쟁의 한가운데, 무리에서 떨어진 국군 인민군 미군이 산골의 한 마을에서 마주친다. ‘동막골’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놀랍게도 전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서 서로 위태롭게 대립하던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점차 경계를 풀고 친구가 되어간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사라진 동료를 찾아 연합군이 들이닥치고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인민군을 색출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연합군이 휘두른 폭력에 주민들은 다치고 한 소녀가 죽는다. 주민들 사이에 정체를 숨기고 있던 군인들은 연합군들에게 반격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작전을 준비한다.

한국전쟁을 앞세우지만, ‘웰컴 투 동막골’은 같은 소재를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 좀 달랐다. 바로 전년에 개봉해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와 비교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간 우리에게 익숙한 전쟁영화는 이념의 대립을 내세우거나 역사의 비극을 가족사의 비극과 겹쳐두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분단 이후의 남북관계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하지만 ‘웰컴 투 동막골’을 본 800만명 이상의 관객들을 사로잡은 건 그런 요소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것이 친북적이고 반미적인 영화라는 우파들의 불만이다. 연합군의 모습이 잔인하게 그려진 데 반해, 인민군의 모습은 친근하게 묘사된다는 이 지적은 일차원적이고 피상적이므로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영화 자체라기보다는 영화 속 한 캐릭터가 불러일으킨 신드롬이다. 배우 강혜정이 연기한 여일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는 머리에 꽃을 꽂고 엉뚱하게 등장해서 요상한 사투리와 제스처로 화면을 장악했다. 당대 수많은 개그맨들이 여일을 흉내 냈고, 그는 지금까지도 ‘웰컴 투 동막골’의 아이콘으로 불려나오는 존재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일의 신드롬은 단지 한 캐릭터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다. 그는 ‘웰컴 투 동막골’의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다. 그것은 어떤 세계인가.

이 영화를 반미적이라고 보는 견해들을 겨냥해서 감독 박광현은 자신이 구축한 세계는 반미가 아닌 반전(反戰)을 주장한다는 다소 평범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무언가에 반대한다면, 그건 미국도 전쟁도 아니라, 적대와 갈등의 장소로서의 정치다. 영화는 그 점을 도입부부터 꽤 명확하게 제시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역사적 사실을 상기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자막이 등장한다. 1950년 9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이 작전으로 고립된 인민군들이 곳곳에 숨어들었으며, 그들을 향한 무차별 폭격이 지속되었는데, 민간인 지역들도 예외는 없었다. 이 영화에서 현실을 환기하는 대목은 딱 여기까지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이 자막의 내용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밝고 화창한 언덕에 서서 머리에 꽃을 달고 환하게 웃는 한 소녀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의 얼굴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지만, 이 장면의 표정만으로는 전시 중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곧이어 미군이 탄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하는데, 창밖으로는 비행기 주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이러한 도입부는 이 세계에 대한 요약으로 보인다. 영화는 전쟁을 지시하는 저 비행기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대신 작은 나비를 그 자리로 보낸다. 티 없이 천진난만한 소녀 여일의 얼굴과 시선은 피로 얼룩진 전쟁의 이미지를 압도하거나 씻어낸다. 영화의 초반, 산속을 헤매던 인민군들이 여일과 처음 대면한 장면을 보자. 그들 앞에 귀신처럼 불현듯 나타난 여일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사내들에게 조언한다. “뱀이 나와. 여가 뱀 바우잖아.” 인민군들뿐만 아니라 보는 관객들도 어안이 벙벙해지게 만드는 이 순간의 매력은 강혜정의 독특한 연기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여일의 몸짓과 말투는 총을 든 자들의 경직된 자세와 시선, 그러니까 전시의 긴장감을 완전히 무력화한다. 이 장면이 내세우는 순진무구함은 강력하다.

여일은 단지 좀 모자란 아이가 아니라, ‘아이처럼 막 살으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동막골, 그러니까 작은 공동체의 세계관을 표상한다. 동막골은 전쟁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양태, 혹은 의미에 대해 아예 무지한 집단이다. 인민군과 국군이 이 부락의 사람들을 가운데 두고 서로 대치하는 장면은 이 공동체의 속성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놓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 군인들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그걸 일종의 놀이처럼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그들에게 총과 수류탄은 쇳덩이일 뿐이고, 난생 처음 보는 미군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이며, 국군과 인민군은 서로에게 화가 나서 잠시 싸운 친구들일 따름이다. 그들은 이념이나 무기의 위력에 주눅 들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공포라는 감정을 잘 모른다. 이 공동체에 힘이 있다면 그건 어떤 대립과 충돌도 불발시키는 천진무구한 무지다. 동막골을 위협하는 유일한 안타고니스트는 특정 집단도, 사람도, 사상도 아니라 농작물을 해치는 멧돼지다.

그러니까 이 세계를 보는 경험은 세속의 이념들이 세탁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동막골에 들어온 국군과 인민군은 이미 집단적 이념의 이탈자들이었고 이곳에서 비로소 온전한 형과 아우의 관계가 된다. 그들은 어느새 군복을 벗고 마을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이 영화는 전쟁의 비극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된 시공간의 선함에 몰두한다. 그 세계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어떤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고운 세계라는 점만이 이 영화의 이슈가 된다.

이 사실에 호응할 때에만, 영화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동막골에 숨어 지내던 군인들은 마을을 공격하려는 연합군의 계획을 알게 되고, 폭격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두 명의 동료를 잃었지만 작전에 성공한 뒤, 그들은 눈이 쌓인 언덕 위에 앉아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들 뒤로 폭탄이 터지고 있다. 영화는 그들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장면은 그들의 죽음을 확실히 암시한다. 그런데 이 순간은 좀 당혹스럽다. 그들은 미소를 짓고 있고, 폭탄은 마치 아름다운 불꽃의 향연처럼 터지고 있다.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이 장면은 괴이하게 잔잔하다. 이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언덕 위에 처절히 고립되어있는 동안, 동막골의 주민들은 산 너머의 불빛을 불꽃놀이를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다. 이념에 휘둘리지 않은 희생적인 군인들이 끝내 동막골의 순결함을 지켜냈다고 영화는 강변하는 것이다. 영화의 문을 닫는 마지막 장면이 그 증거다.

한 방에 남북한의 군인들이 뒤엉켜 낮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유일하게 깨어 있는 여일이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전쟁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평화롭고 한가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다. 이것이 플래시백인지, 누군가의 꿈인지, 혹은 영화의 뒤늦은 소망인지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영화가 군인들의 자살행위(언덕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의 행동이 자살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와 동막골의 순진무구함을 맞바꾸는데 망설임이 없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영화에 열광한 이들은 이념을 초월한 동막골의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미래를 열망한 것일까. 대립 이전의 과거를 향수한 것일까. 그해 6자회담이 거둔 성과(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의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나 남북 단일팀에 대한 논의, 이산가족상봉 행사 등을 떠올리며,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응을 연관지어볼 수도 있겠다. 혹은 12년 뒤에 개봉한 ‘강철비’의 결말을 상기하며 이런 비교도 가능하다. ‘강철비’가 결국 남과 북이 핵을 공유하며 열강들의 압력에 힘으로 맞서기로 한다면, ‘웰컴 투 동막골’은 국군과 인민군이 함께 목숨을 바쳐 외부의 악으로부터 내부의 선함을 구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더 많다. 힘의 논리에 매혹된 ‘강철비’나 선함에 도취된 ‘웰컴 투 동막골’이나 맹목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동막골의 가치를 대변하던 여일은 죽었으며, 동막골은 살육의 현장을 경험했으므로,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 군인들의 희생으로 그곳의 순수함이 보존되었다는 착각은 영화를 보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작동시키고 용인한 판타지에 가깝다.

게다가 영화는 결말부에서 군인들이 싸운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그 악(연합군)에 ‘우리’도 포함되지 않느냐는 반문은 없다. 동막골에서 순수함을 승인받은 개별자들과 그들을 공격하는 악의 무리라는 구분만 여기 존재한다. 정치로부터 끈질기게 퇴각하고 분리될 때, 어떤 무결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퇴행적인 믿음이 이 영화의 유일한 동력이다. 전쟁영화가 필연적으로 품어야 할 뾰족한 각들을 모두 지우고 그 세계를 과거에 유폐하며 거기에 더없이 모호한 착한 ‘우리’를 투영하는 환상, 그것이 ‘웰컴 투 동막골’이 일으킨 신드롬의 정체다.

▒ 박광현 감독은
이전에 없던 한국戰 소재 데뷔작으로 대박… 최근엔 TV용 단편 제작도


1969년에 태어난 박광현(사진)은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는 CF 감독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중, 장진 감독이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2002)에서 ‘내 나이키’를 연출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3년 뒤 발표한 장편 데뷔작 ‘웰컴 투 동막골’은 장진이 쓴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로 그해 최고의 화제작에 올랐다. 한국영화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한국전쟁을 소재로 삼지만, 독특한 캐릭터와 서사적 설정, 세련된 미장센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국내외 영화제들에 초청되었다. 물론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배우 조인성과 ‘권법’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으나, 무수한 소문을 뒤로하고 결국 이 프로젝트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웰컴 투 동막골’이 개봉된 시점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2017년, 그는 지창욱 심은경 등과 함께 범죄 액션물 ‘조작된 도시’를 선보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게임이라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범죄를 오가는 청춘들의 모험을 그렸다. 최근에는 JTBC ‘전체 관람가’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 오정세를 못생긴 히어로로 출연시킨 단편 ‘거미맨’을 공개하기도 했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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