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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스페셜] 열정으로 한 땀 한 땀 ‘평창의 추억’ 새기다… 주변인 '자랑'된 올림픽 도우미들

(1)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여한 올림픽 도우미들이 올림픽 개회식을 한 달 앞둔 1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용산리 메인프레스센터(MPC) 내 등록센터(UAC)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있다.뉴시스 (2)수호랑 인형이 잠시 조형물에 기대 앉아 쉬고 있다. 아르바이트생 최정권씨(작은 사진)다. 최정권씨 제공 (3)북한 선수단을 맞는 화동으로 참가한 김송하양이 지난달 8일 올림픽 선수촌에서 청사초롱을 든 한복 차림으로 포즈를 취했다.어머니 한나씨 제공 (4)개회식에 참가국 피켓을 들고 입장했던 대학생들이 지난 3일 서울 마포구 합정역 근처 카페에 모였다. 왼쪽부터 박세은 김지우 한새영 임예린씨. 이형민 기자




수호랑으로 활약한 최정권씨
높아진 수호랑 인기 몸소 느껴 시민들 찾아와 간식 주며 격려도…아직 올림픽 여운 못 헤어 나와

북한선수단 화동 김송하양
북한 사람들 한복만 입은 내게 ‘많이 춥지’라고 걱정해줬을 때 이웃사촌처럼 가깝게 느껴져

4인의 개회식 피켓요원
가족들 평창 참가 자랑스러워해… 국제적인 행사의 한 부분 담당, 전체가 완성됐다는 사실 뿌듯


열흘 전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은 온 국민에게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개막식 피켓 요원부터 마스코트인 수호랑까지 경기 외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평창올림픽에 참여한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다. 자원봉사로, 아르바이트로, 고향에서 열리는 대회 도우미로, 저마다 올림픽에 참여한 이유는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3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국제적인 축제의 일원이 됐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짧고 화려했던 2주간의 축제는 이제 끝났다. 이들은 이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지금도 평창올림픽을 자꾸만 검색해본다고 했다. 경기장 안팎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올림픽을 가꿔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는 수호랑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캐릭터의 승리’로도 기억된다. 공식 마스코트인 수호랑은 올림픽 기간 내내 전 세계에서 온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올림픽 공식 기념품점에서도 수호랑은 최고 인기였다. 평창조직위 공식 온라인 판매점에서는 수호랑 인형 아홉 종 전체가 품절됐다. 온라인 중고물품 거래 사이트에서는 메달리스트에게만 주어진 ‘어사화 수호랑’ 인형을 100만원을 주고 사겠다는 사람도 등장했다.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쉬고 있다는 최정권(33)씨는 수호랑이었다. 수호랑 인형을 쓰고 올림픽에 참여했다.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강릉에서 대학을 다닌 그는 올림픽 성공 개최를 염원하면서 지난 4년간 홍보 서포터스 활동을 해 왔다. 정권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다”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인형 탈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수호랑으로 분한 이들은 정권씨를 포함해 모두 8명이었다. 오전, 오후로 나눠 교대로 수호랑 탈을 썼다. 올림픽 경기장 일대를 돌아다니며 한쪽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발레 선수들처럼 포즈를 취했다. “우와 저 발 좀 봐봐.” 시민들은 수호랑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수호랑이 뒤뚱뒤뚱 달리는 인터넷 동영상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는 “올림픽 기간을 거칠수록 수호랑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실감했다”며 “많은 시민들이 쉬는 시간에 찾아와 초콜릿이나 비타민음료, 간식 등을 두고 갔다”고 말했다. 한 시민은 수호랑 탈을 쓴 동료를 안으며 ‘너 보려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권씨는 “동료들이 연예인이 된 기분이 이런 건가라고 서로 얘기하며 즐거워했다”고 했다.

고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호랑 탈을 쓰면 바깥을 볼 수 있는 곳은 인형의 콧구멍 자리뿐이었다. 시야가 좁은 데다 무거운 탈 때문에 목과 허리에 통증이 왔다. 시민들 중에는 수호랑을 보면 달려와 반갑다며 주먹으로 때리는 이들도 있었다. 정권씨 동료 중에는 날아온 주먹에 탈이 벗겨져 당황한 경험도 있다고 했다.

정권씨는 “그래도 수호랑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우리가 탈을 쓰고 인기가요에 맞춰 춤을 춘 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될 때마다 즐기면서 일할 수 있었다”며 “아직도 올림픽이 남긴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화동이다

지난달 8일 선수단의 선수촌 입촌식에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화동들이 활약했다. 강릉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김송하(10)양은 강릉시청이 선수단 입촌식 화동을 모집할 때 자원했다. 송하양 어머니 한나(37)씨는 “어른들이야 올림픽이 국제적 행사이고 쉽게 접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이들은 모르지 않느냐”며 “고장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아이가 가까이서 체감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송하양은 면접을 거쳐 최종 선발돼 북한 선수단의 화동을 맡았다. 아이는 오랫동안 북한 사람들을 무섭다고 인식해 왔다. 한나씨는 “딸아이가 평소 북한은 말을 잘 안 듣는 나라로, 북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여겨 북한 선수단 화동을 맡게 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걱정부터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우려는 기우였다. 입촌식 당일 실제 북한 사람들을 만나고 온 송하양은 “엄마, 우리나라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네”라고 말했다. 송하양은 “북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편하게 느껴졌고 친절했다”고 했다.

‘북한 선수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거나 말을 걸지 말라’는 지침이 있어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북한 선수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추운 날씨에 한복만 입고 화동을 하느라 코가 빨개진 송하양에게 북한 선수들이 “많이 춥지”라며 걱정을 해줬다. 한 북한 선수는 송하양에게 “네가 입은 게 한복이니”라며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다. 한나씨는 “그 모습에 북한 사람들도 이웃사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송하양은 6∼8일 패럴림픽 선수단 입촌식 기간에도 화동 역할을 맡는다. 아이는 벌써부터 올림픽 축제가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한나씨는 “딸아이가 ‘올림픽 언제까지 하느냐’고 묻는다”며 “이제 곧 끝난다고 말해줘도 ‘그럼 언제 다시 하느냐’고 되묻는다”고 했다.

아이만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다. 한나씨는 “일상적으로 자주 다니던 수목원부터 늘 드라이브 삼아 다니던 경포호길도 올림픽으로 특별해졌다”며 “짧은 축제가 끝나고 모든 것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아쉽다”고 말했다.



우리는 피켓요원이다

지난달 9일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에서 선수단만큼 눈길을 끈 이들은 함께 입장했던 피켓요원들이었다. 30명의 피켓요원들이 92개 나라에서 온 선수단의 앞에 서서 올림픽 스타디움을 밝혔다. 각자 서너 국가씩 맡아 스타디움을 몇 바퀴나 돌았다. 겨울왕국 여왕의 드레스인 양 아름다운 의상으로 전 세계인의 눈길을 끌었다.

3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역 근처 카페에서 만난 올림픽 피켓요원 네 명은 “평창에 다녀왔더니 서울에서는 롱패딩을 입을 일이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혹한기 훈련을 다녀온 군인처럼 평창 추위를 견디고 나니 서울은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은 가족과 친구의 자랑이 됐다. 대학에서 연극연기학을 배우고 있는 박세은(21)씨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개회식 당일 찍은 내 사진을 크게 뽑아서 액자로 만들어 집에 걸어놓으셨다”며 “아빠는 카카오톡 프로필 배경화면을 내 사진으로 바꿔놓고 동네방네 자랑하신다”고 말했다. 모델과에 다니는 김지우(19)씨는 “평소 표현을 잘 안 하시는 부모님도 ‘사진 더 보내라’고 하실 정도였다”며 “나도 할아버지가 휴대전화 배경화면을 내 사진으로 바꿨다는 얘기를 듣고 뭉클했다”고 말했다.

참가한 계기도 다양했다. 무용을 전공한 한새영(22)씨는 집안의 막내로 늘 귀염만 받아 왔다. 피켓요원 참가는 새영씨가 처음 스스로 결정한 인생의 경험이었다. 그는 “단지 예뻐 보이기 위해 피켓요원에 지원한 것은 아니다”며 “무용과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얻은 경험을 사회 진출 전에 활용해보고 싶어 피켓요원들의 대표인 단체장까지 자원했다”고 말했다. 항공승무원과에 재학 중인 임예린(21)씨는 “자존감이 낮은 내가 큰 국제 행사에 참여하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 피켓요원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피켓요원들의 첫 리허설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예린씨는 “춥다는 공지를 듣고 많이 걱정했는데, 막상 경기장에 가니 우리가 입은 의상 위로 경기장의 불빛과 흰 눈빛이 드리워지는 광경이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고 회고했다.

30년 전 88올림픽의 기억을 부모들로부터 들으며 자란 이들이 이제 평창올림픽이라는 경험을 직접 장착하게 된 셈이다. 지우씨는 “국제적인 행사에서 내가 한 부분을 차지해 전체를 완성했다는 사실이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 같은 느낌”이라며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형민 손재호 황윤태 심우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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