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실미도, 비운의 섬은 왜 1000만 신화의 첫 장이 되었나


 
영화 ‘실미도’ 속 부대원들. 영화에서는 전직 조직 폭력배들로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인들이었다고 한다. 영화사 제공
 
1968년 투항 당시 김신조(위 사진 왼쪽 두 번째). 현재는 한국에서 목회자로 활동 중이다. 실제 684 부대원들. 684 부대와 유사한 임무를 맡았던 또 다른 특수부대들도 있었다고 한다(아래 사진). 실미도전우회 제공
 
영화 초반부 강조되는 혹독한 훈련 장면. 영화사 제공
 
강우석 감독


오합지졸 폭력배가 전문 군인으로… 훈련 과정 장르적 분위기에 초점
거기에 전우애·인간애·가족애 등 한국영화 전통의 감정 호소 더해
어두운 역사 희생양들 애환도 강조… 신화적인 흥행 성공 ‘실미도 현상’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31명의 무장 군인이 한국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파된다. 이들은 청와대로 향하던 중 검문에서 발각되어 29명이 사살되고 1명이 도주하고 1명은 투항한다. 1968년 1월의 일이다. 이 희대의 사건은 일명 1·21 사태 또는 투항한 1명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으로 불린다. 김신조 사건은 당대의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리고는 이내 박정희 시대의 강압적인 안보주의로 이어진다. 국가 안보 강화라는 이름 아래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이 높아지고 대학교와 고등학교에는 교련 과목이 의무화되고 군전역자를 대상으로 한 예비군 제도가 부활한다.

일명 684부대 혹은 실미도 부대의 창설도 잇따른 결과들 중 하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주도 아래 공군 소속으로 창설된 이 특수부대의 목적은 김일성 암살이었다. 김신조 일당과 동일한 31명 구성을 기본으로 했으며 그들과 동일한 무장 침투 및 암살 방식으로 보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가혹한 훈련 과정 중 7명이나 사망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인근 마을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등 이미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의 완화, 남북한의 일시적 화해 분위기 조성 등에 따라 부대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무색해지자 상황에 불만을 품은 훈련병들이 기간병 18명을 사살하고 섬에서 집단 탈영하여 버스를 탈취한 뒤 청와대로 돌진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들은 군경과 무력 대치 중 마침내 버스 안에서 집단 폭탄 자살을 시도하고 대개 사망한다. 이 비극적 사건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영화 ‘실미도’(2003)를 계기로 알려지게 됐고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 첫 번째 1000만 관객 영화가 되었다.

‘실미도’는 도입부에서 별도의 설명 없이 김신조 사건과 684 부대 창설 과정을 빠르게 교차 편집한다. 그리고는 이내 본격적인 이야기로 진입한다. 중형을 받은 폭력배들이 부대원들로 선발되고 이 중에서도 강인찬(설경구)이 중심이 된다. 부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안성기)이 또 한 축을 이루는 주요 인물이다. 이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몇 가지 장치를 취하게 된다. 이 장치가 ‘실미도’를 1000만 영화로 만든 요인과 아주 연관 없진 않을 것이다.

우선 ‘실미도’는 의외로 ‘아마추어에서 전문가로’라는 수련 내지는 훈련의 드라마를 완성하는데 영화 초반의 초점을 둔다. 훈련 과정 중 짓밟히고 다치고 죽어가는 비운의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이하게도 영화는 그것을 넘어야 하는 어떤 통과의례의 과정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서는 폭력이나 일삼던 오합지졸의 폭력배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서 기술을 습득한 전문적인 군인이 되어 가는가, 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영화는 적잖이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니까 ‘실미도’는, 마치 할리우드의 어떤 영화들이 그러하듯, 초짜 영웅이 진짜 영웅으로 변모해가는 그 훈련 과정의 장르적 분위기 형성에 몰두한다. 그걸 통해 주인공들에 대한 관객의 유연한 공감대를 열어두려 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일종의 전우애 인간애 가족애라는 감정적 호소다. 훈련 중 팔과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된 동료를 데리고 함께 가고자 하는 부대원들의 의지가 드러날 때는 전우애가, 처음에는 갈등을 겪었던 동료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가까워지거나 자신들을 감시하고 폭행해온 어린 기간병들과 마음을 주고받을 때는 인간애가, 떠나온 가족 특히 강인찬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날 때는 가족애가 강조된다.

장르적 컨벤션(특정 장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많이 봐 왔던 관습적 장면)과 감정적 호소가 뒤섞이며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이제는 비운의 역사성이 강화된다. 강인찬이 아버지의 사상 행적 때문에 연좌제로 고생하는 것이 하나의 일화로 등장한다. 결정적으로는 684 부대원들이 자신들이 국가에 의해 버려졌음을 알고 난 뒤 반란을 도모하고 섬을 탈출하여 청와대로 향하기까지의 과정에서 특히 그렇다. 탈영한 이들을 두고 군경이 무장공비로 몰아세우자 684 부대원 중 하나가 죽어가며 억울함을 호소한다.“무장공비는 너무한 거 아니야?” 말하자면 국가우선주의의 희생양에 대한 드라마가 ‘실미도’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불운하게 죽어간 모든 이들에 대한 위령의 말로 맺어진다.

‘실미도’는 전반적으로 섬세하지 않고 투박하다. 때로 영화의 어떤 장면은 너무 끔찍하고 문제적이다. 그렇지만 앞서 기술한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적 컨벤션과 한국영화 전통의 과잉적 감정에의 호소와 어두운 역사를 반추하게 하는 희생양들에 대한 애환의 드라마는 도식적임에도 내적인 힘을 발휘한 것 같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작품의 내적인 장치에 관하여 재고해볼 순 있지만 그것이 ‘실미도’를 1000만 영화에 등극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단정 짓기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오히려 그것만으로는 설명해 낼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겠다. 앞서 지적한 작품의 장치들을 긍정적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이 영화를 보는 경험은 결국 괴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결국 중요한 건 ‘영화 실미도’가 아니라 ‘실미도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는 것 자체가 시종일관 이토록 괴로운 영화가 어떻게 1000만 관객을 만들어 낸 것일까 하는 건 미스터리다. ‘실미도’ 개봉 당시에도 각종 언론과 전문가들이 이 영화의 흥행 요인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는데, 그 내용들을 조금 덧붙여보는 게 좋겠다. 말하자면 ‘실미도’의 신화적인 흥행 성공에는 내적인 요인 못지않게 외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첫 손에 꼽히는 것은 산업적 조건이다. 극장 인프라 확대가 관객 수 자체를 급격하게 확장시키던 때였다. 게다가 ‘실미도’는 전국 1200여개 관 중 300여개 관에서 개봉하면서 당시로서는 대규모에 속하는 와이드 릴리즈 배급 방식을 취했다.

경청할 만한 사회학적 분석을 내놓은 이도 있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은 ‘실미도’ 개봉 당시 영화주간지 ‘씨네21’을 통해 ‘실미도’ 흥행 요인에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한국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 점철되어 있던 국가동원체제의 망령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국가동원체제가 내면화되어 국민들이 일종의 방어적 집단주의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이 보았다면 나도 본 사람들 중 하나에 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방어적 집단주의의 과열이 ‘실미도’ 보기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 문화민족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관람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 이후 형성된 문화적 결속주의 혹은 집단주의의 문화적 잔영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특히 문화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지금의 우리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이것이 당대 한국영화의 어떤 특별한 소재주의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실미도’ 개봉을 앞뒤로 실화에서 소재를 가져오는 실화영화 제작이 주류영화계를 휩쓸고 있었다. 대개 그건 과거의 기구한 역사적 인물이거나 사건들이었고 ‘실미도’는 그 소재의 계열 중 대표적인 성공사례에 속한 대작영화였다. 게다가 2002년과 2003년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SF 혹은 순수 장르주의 대작 영화들이 줄줄이 참패하던 즈음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실미도’는 가까운 한국 현대사의 불운한 역사 그러나 아직까지 말해지지 못했던 것의 역사를 밝혀야 한다는 민족적 공감대를 자극하는 한편, 한쪽으로는 영화 대작주의 즉 할리우드 영화에도 맞설 수 있는 우리만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민족 문화적 자긍심을 자극하기도 했던 것이다. 불운한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환기, 대작주의에의 치열한 동경, 문화민족주의에의 뜨거운 자긍심 등이 ‘실미도’를 겹겹이 감쌌던 건 사실이다. 그건 ‘실미도’뿐 아니라 연이어 나온 ‘태극기 휘날리며’의 1000만 관객 돌파라는 성공으로도 이어지며 증명됐다.

다만 이 성공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거나 곧 변조되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민족적 환상은 점점 더 소멸해갔거나 그 반대로 완전히 내면화되어 갔다. 그래서 특별히 민족적 상상력 혹은 애국적 가상게임이라고 의식하고 내세우면서 만들어진 영화 ‘한반도’(2006)가 나왔을 때는, 즉 ‘실미도’의 감독이 다시 한 번 앞선 성공의 기운을 모아보려 했을 때에는, 대중도 얼마간 그 환상과 환호의 정점을 약간은 지나 있었던 것이다.

▒ 강우석 감독
90년대 최고 흥행사… ‘공공의 적’ ‘이끼’서도 녹슬지 않은 실력


강우석(58·사진) 감독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능한 대중 영화감독일 뿐 아니라 안목 있고 뚝심 있는 제작·배급업자로도 유명했다. 초반기에는 사회파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대표작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강 감독은 90년대 초반을 넘어가며 본격적인 대중 장르물을 만들기 시작한다. ‘미스터 맘마’(1992) ‘투캅스’(1993) ‘마누라 죽이기’(1994) ‘투캅스2’(1996)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며 이 작품들로 90년대 최고의 흥행사로도 등극한다.

제작사 시네마서비스의 대표로서 대중에게 각광 받은 여러 편의 대중영화들도 제작해 왔다. 마침내 ‘실미도’(2003)로 한국영화 관객 1000만을 돌파한 첫 번째 영화라는 흥행 신화를 쓰기도 했다. 감독으로서 그의 실력이 출중하게 드러난 작품으로는 무엇보다 ‘공공의 적’(2002)을 꼽을 수 있다. 무식하지만 정의로운 형사 강철중(설경구)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창조, 성공적인 시리즈물로 이어지게 된다.

‘한반도’(2006) 이후에는 한동안 제작자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끼’(2010)로 다시 연출에 뛰어들어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대기업의 강력한 위세 속에서 예전의 영향력과 명성을 잃은 것이 사실이지만, 꾸준하게 다양한 영화들을 제작 및 연출하고 있다. 최근 작품으로는 ‘전설의 주먹’(2012) ‘고산자, 대동여지도’(2016) 등이 있다.

<정한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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