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죽음 이후의 부활을 염원하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32년에 완성한 작품 ‘더 이상 놀지 마라’. 작품의 왼쪽과 오른쪽에 꽂혀 있는 막대기는 각각 자코메티와 그의 아버지를 의미한다. 필자 제공
 
엘람인들의 일출 의식이 담긴 조각 ‘시트-샴시’. 필자 제공
 
이집트의 ‘위문’. 필자 제공
 
배철현 교수


초현실주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레통과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1930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인 ‘매달린 공’을 ‘갤러리 피에르’에서 관람했다. ‘매달린 공’은 철 구조물 안에 공이 매달려 있는 이색적인 형태의 작품이었다.

브레통과 달리는 자코메티야말로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조각 세계에서 구현할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 변신과 진화를 항상 시도하던 예술가 자코메티는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자코메티는 30년부터 34년까지 초현실주의 정신에 입각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브레통과 달리의 기대를 배반했다. 자코메티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심리학에 근거해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코메티는 보수적인 개신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코메티는 비슷한 시기에 현실에 유용한 물건을 실용적이면서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실내 장식’ 분야에 뛰어들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을 내놓는 실내 디자이너는 장 미셀 프랑크였다. 프랑크는 기구한 개인사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두 형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숨을 거뒀다. 그의 아버지는 이 비보를 듣고 힘겨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셈이다.

하지만 프랑크는 유럽 귀족들의 취향에 맞는 실내 장식품들을 제작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았다.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만드는 작품과는 결이 달랐다. 초현실주의에 매료된 예술가들의 작품은 외설적이면서 투박했다. 하지만 프랑크의 작품은 우아했다. 그의 작품은 파리 상류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자코메티는 이 같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프랑크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자코메티는 프랑크를 위해 화병 램프 그릇 촛대 샹들리에 거울 등을 만들었다. 아울러 프랑크를 통해 프랑스의 ‘상류 사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상류 사회 사람들은 처음엔 자코메티를 마뜩잖게 여겼다. 그가 브레통과 교류하면서 대중 혁명을 꿈꾸는 과격한 사상에 빠졌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자코메티의 작품은 세련되면서 실용적이어서 상류 사회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많은 이들이 의심을 거두고 자코메티와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더 이상 놀지 마라’

자코메티는 파리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명성과 부를 동시에 거머쥔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파리의 밤을 즐겼다.

하지만 자코메티는 이 시기에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 놓았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드러낸 작품을 한 점 내놓게 된다. 32년 발표한 ‘더 이상 놀지 마라’라는 작품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이자 사진작가이며, 자코메티의 가까운 친구인 만 레이는 당시 파리의 최고 예술잡지였던 ‘카에 다르’에 자코메티의 이 작품을 소개했다. 이 작품은 직사각형 석판이다. 표면에는 달걀 모양의 분화구가 곳곳에 새겨져 있다.

중앙에는 얕은 직사각형 홈이 파져 있다. 이것은 무덤이다. 맨 뒤에 있는 무덤은 무언가에 덮여 있고, 앞에 있는 무덤들은 덮개가 열려 있다. 누군가 급하게 무덤을 파헤친 듯한 모습이다. 뚜껑이 열려 있으니 그 안에 들어있는 시체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석판 양쪽에는 사람이 서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올리고 있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 했을까. 무덤 안에는 누가 있는 걸까.

자코메티에게 31년과 32년은 ‘과거의 종결’이자 ‘미래의 시작’이 됐던 해다. 당시 자코메티의 삶은 다사다난했다. 그의 대부이자 스위스 인상파 화가인 쿠노 아미에의 화실엔 불이 났었고, 자코메티의 충실한 조수이자 동생인 디에고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자코메티는 32년 첫 개인전을 열면서 고향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이듬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고향 스탐파에 가면 항상 자신을 반겨주었던, 그의 첫사랑인 비안카와 여동생 오틸리아가 모두 결혼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이 시기에 자코메티는 루이 아라공의 과격한 저널인 ‘라 뤼트’에 정치적인 글을 싣기도 했다.

‘더 이상 놀지 마라’는 작품은 ‘더 이상 놀 수 없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을 염원하는 작품이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두 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엘람인들의 ‘일출 의식’

우선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엘람인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엘람인은 이란 남부 지역인 수사를 중심으로 기원전 3200년부터 인류 최초 문명을 이룩한 민족이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인 엘람어는 수메르어와 마찬가지로 동서고금의 어떤 언어하고도 유전발생학적으로 연관이 없는 언어다.

엘람인들이 만든 ‘시트-샴시’라는 작품은 기원전 12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시트-샴시’는 ‘태양의 떠오름’, 즉 ‘일출’이란 의미다.

작품을 보면 옷을 입지 않은 사제들이 항아리, 제사를 위한 빵, 그리고 비문이 적힌 돌기둥과 같은 제기들 사이에서 종교 의례를 행하고 있다. 이 의례는 세련된 도시 안에서 거행되고 있다. 이 도시엔 높은 건물과 테라스가 있는 신전이 있다. 그리고 나무가 심겨져 있다. 아울러 음식들은 점으로 표시되었다. 사제들은 수염이 없고 머리를 깨끗이 밀었다.

사제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바닥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나는 슈트룩-나훈테의 아들 실학-신슈 쉬낙이며 인슈쉬낙 신의 사랑을 받는 종이다. 나는 안샨과 수사의 왕이다. 나는 청동으로 ‘일출’을 제작하였다.”

자코메티의 ‘더 이상 놀지 마라’는 엘람인들의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조각이다. 엘람인들에게 일출 의식은 마술과도 같은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일출 의식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태양이 매일매일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위문’

‘더 이상 놀지 마라’ 중간에 있는 무덤은 고대 이집트의 ‘위문’이라는 장례의식에 사용되던 문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위문’은 드나드는 문이 아니다. 이집트인들은 장례를 지낸 뒤 무덤 입구를 벽으로 막고 그 위에 문을 만들어 색을 칠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위문이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경계라고 여겼다. 자손들이 이 위문 앞에 음식을 가져오면 죽은 자의 영혼인 ‘카’가 밖으로 나온다고, ‘카’는 밖으로 나와 햇빛을 맞으면서 음식의 향기를 맡는다고 말이다.

자코메티에게 32년은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던 시기다. 자코메티는 스무살 때 피렌체를 방문해 산마르코성당에서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랬듯 ‘더 이상 놀지 마라’에 삶과 부활의 과정을 녹여내려고 했다.

‘더 이상 놀지 마라’의 오른쪽에서 서 있는 인물은 자코메티의 아버지인 지오반니 자코메티일 것이다. 손을 하늘을 향해 뻗은 것은 사실 아들을 걱정하면서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왼쪽에 외롭게 서 있는 사람은 자코메티라고 할 수 있다. 자코메티는 자신의 두 발로 홀로서기를 막 시작하는 단계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자코메티가 바야흐로 독립적인 예술가가 되길 꿈꾸고 있다는 것을.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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