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사람은 간데 없고 달빛만 푸르네”

김형구 ‘달과 노인정’, 유화, 1989.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고요히 흐르는 강 위로 보름달이 둥실 떴다. 구름처럼 뽀얀 달무리가 달을 부드럽게 에워싸고 있다. 강둑에는 낡은 정자가 보이고, 소나무 세 그루가 가지런히 서 있다. 늠름하게 뻗은 중앙의 소나무는 잎새가 무성하다. 여름이면 그 무성한 잎새들이 정자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으리라. 소나무 줄기들이 붉은 걸 보니 적송(赤松)이다. 적송의 붉은 줄기와 푸른 하늘의 대비가 강렬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톤은 더없이 은은하고 차분하다.

한국 산천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정겨운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이는 3년 전 타계한 화가 김형구다. 엄동설한을 제외하곤 사시사철 스케치북을 끼고 현장을 찾았던 그는 탄탄한 미감을 보여주는 풍경화를 여럿 남겼다. 고즈넉한 강변을 비추는 달과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를 연한 푸른빛으로 통일하고, 소나무를 맞춤한 자리에 배치한 구도는 끈질긴 사생의 결과물이다.

1922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나 도쿄의 무사시노 미대를 졸업한 김형구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도 일평생 작업을 이어갔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신이 창조한 아름다움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졌으면 좋겠다”며 경건한 마음으로 자연의 싱그러움을 화폭에 담아냈다.

김형구는 미술계를 풍미했던 최신 사조와는 거리를 둔 채 아카데미즘에 기반한 회화를 견지했기에 명성은 다소 가려진 면이 있다. 그러나 유려한 풍경화와 함께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낸 인물화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마침 화가의 유족이 지난해 고인의 ‘자화상’과 ‘혜화동 풍경’ 등 대표작과 자료 일체를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 기증해 고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뜻깊은 기획전(∼4월 14일)이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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