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자코메티의 예술세계] 기존의 틀 깨고 관찰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당겨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1930년대 초반에 완성한 작품 ‘매달린 공’. 특이한 형태를 지닌 ‘매달린 공’은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 제공
 
앙드레 브레통
 
배철현 교수


불안

1930년대 유럽은 불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10년 이상 흘렀지만, 유럽인들은 마음을 의지할 신앙적인, 혹은 사상적인 기반이 없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조각가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엔 자코메티 역시 ‘보통 사람’이었다.

자코메티는 자신을 아낌없이 후원해주는 가족,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사귀기 시작한 예술학교 친구들, 그리고 조르주 바타유와 교류하면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타유를 통해 아방가르드 예술의 정신을 받아들였고,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를 통해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는 과격한 바타유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자코메티는 “인간으로서 지니는 일상성을 완전히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타유의 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대신 자코메티는 초현실주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초현실주의는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 삶에 대한 이성적인 이상을 거부하는 사상이며, 무의식과 꿈이 가져다주는 통찰을 선호하는 사상이다. 초현실주의는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영향을 받아 문학에 적용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3년에 쓴 연극 극본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를 실제로 창시한 사람은 앙드레 브레통이다. 그는 바타유와 그가 출간한 ‘도퀴망’이란 잡지를 선정적인 형용사만 남용하는 쓰레기라고 혹평했다.

바타유와 브레통의 탐구 대상은 성, 공격성, 정신분석, 그리고 평범한 물건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물신(物神) 경향이었다. 브레통은 ‘초현실주의자 선언’(1924)에서 초현실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초현실주의는 순수한 심적인 자동현상이다. 생각의 진실된 기능을 말, 글 혹은 다른 수단으로 표현한다. 생각의 지시는 이성을 통한 모든 감독을 제거하고 모든 미적이며 도덕적인 편견 밖에 있어야 한다.”

브레통이 발표한 ‘초현실주의자 선언’, 그것은 1848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혁명을 부추긴 ‘공산당 선언’ 같았다. 부르주아 지도층이 장악하던 예술에서 벗어나자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27년엔 초현실주의자 5명이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충동적인 그리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부의식(副意識)을 밖으로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브레통의 이 주장은 당시 작가들, 예술가들, 사진작가들, 영화감독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앙드레 브레통

브레통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무병으로 참전했다. 그는 이 참혹한 전쟁에서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경악했다. 그는 인간 심리에 숨겨진 공격성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감지했다.

바타유는 당시 파리 지식인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경쟁한 브레통을 인간이란 동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 박제된 이상주의자라고 공격했다. 브레통은 자기 휘하에 있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극단적인 바타유에 매료돼 이탈하는 모습을 보고 1929년 12월 ‘초현실주의의 두 번째 선언’를 발표했다. 브레통은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신을 승화하려는 자들만이 초현실주의 측근 그룹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자코메티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기독교에서 떨어져나간 분파이자 대안이었다. 초현실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도덕을 부정했다.

자코메티는 그리스도교의 대안으로 파리에 나타난 ‘초현실주의’를 당분간 자신의 종교로 수용했다. 초현실주의는 1965년 브레통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취를 감췄다.

초현실주의 작품 ‘매달린 공’

‘매달린 공’은 바타유와 브레통, 이들 모두의 생각이 담긴, 경계에 있는 작품이다. 밑에 있는 초승달 모형 위로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공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장악하지 못한 예술가의 불안한 심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 바타유의 정신을 대변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브레통 세계관을 설교한다. 아울러 성적으로 지나치게 가학적인 느낌도, 성적인 무언가를 숨기는 느낌도 준다. 이중적인 의미를 띤 조각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흔적들의 시간’이었다. 이 작품은 1930년 4월 파리 ‘갤러리 피에르’에 처음 전시됐다. 스페인 화가 후안 미로와 독일 조각가 한스 아르프도 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브레통과 살바도르 달리는 ‘매달린 공’을 보고 매료됐다. 자신들이 형상화하려는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가장 예술적으로 표현했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코메티를 근대 연금술 창시자인 스위스인 파라켈수스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브레통은 초현실주의와 연금술은 모두 무시간성을 추구한다고 믿었다. 브레통은 실제로 자신의 묘비에 ‘로흐 뒤 탕(l’hors du temps)’이라는 문구를 선택했다. ‘로흐 뒤 탕’은 ‘시간이라는 황금’ 혹은 ‘시간을 넘어선’으로 모두 번역될 수 있다.

‘매달린 공’은 철 구조물 안에 마련된, 석고 단 위에 올려져 있다. 가운데가 볼록한 석고 바닥 위에는 세 면으로 된 석고 쐐기가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잘린 멜론 조각 같은 모습이다. 이 쐐기 조각은 왼쪽이 들렸는데, 기댈 벽 없이 하늘로 치솟아 있다.

구조물 중간에는 쇠막대기가 있다. 이 막대기에는 줄이 달려 있고, 줄 끝에는 공이 매달려 있다. 이 공은 완벽한 원이 아니다. 쐐기 조각과 만나는 부분이 앞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움푹 들어갔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다. 공의 무게를 지탱하는 쇠막대기의 줄은 쇠가 아니라 이동 가능한 줄이다. 누군가 그 줄을 움직인다면, 공이 쐐기 모형 위로 움직일 수 있다. 공은 오른편으로 이동 가능하다. 왼편으로 움직이려면 파괴돼야 한다.

관찰자

‘매달린 공’의 전체 배열을 보면, 관찰자의 개입이 없다면 심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쐐기 조각과 공, 그리고 매달린 끈은 상호 작용을 부추긴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고 있는 나를 끌어들인다. 나로 하여금 공이 매달린 줄을 좌우로 흔들어 움직이게 하고 싶은 호기심과 충동을 자극한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즉흥성과 순간성, 그리고 관찰자의 개입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자코메티는 새장과 같은 전체 구조를 통해, 전통적인 조각 예술의 표현 방법을 사용했지만, 조각들이 상호 작용하고 관찰자의 개입을 허용했다는 점에서 당시까지 시도해온 조각들의 틀을 흔들었다. 자코메티는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 ‘진리’라고 가정한 것들을 ‘모호함’과 ‘알 수 없음’으로 대치했다. 자코메티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덤덤하게 말했다.

“걸어가는 다리, 올리고 있는 팔, 곁눈질하는 눈을 조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그걸 조각할 수 있을 거라고 바랄 뿐이죠.”

이 조각은 조각가와 관찰자, 고정과 움직임, 나와 너의 구분이 사리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더 나아가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초현실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을 보는 나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새롭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작품을 제작한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주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사람들은 작품의 주인은 작품의 제작자가 아니라 작품을 해석하는 ‘나’일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매달린 공’은 초현실주의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실존주의 철학의 씨앗이 되었다. 자코메티는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이 작품을 어떻게 만지시겠습니까?”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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