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시대다] 맹목적인 복수와 죽음의 사슬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이 자신의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한 류(신하균)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죽이려 하고 있다. 영화사 제공
 
위쪽 사진은 연인 관계인 청각장애인 류와 무정부주의자 영미(배두나). 아래 사진은 죽은 누나와 류, 그리고 류가 유괴한 아이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장면. 영화사 제공
 
박찬욱 감독
 
박찬욱의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왼쪽 사진부터) 포스터. 각 영화사 제공


2002년은 더없이 소란한 해였다. 6월의 거리는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사회 전체가 ‘월드컵 4강 신화’에 도취, 아니 마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달, 여중생 신효순·신미선이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 축구팀이 터키와 3·4위 결정전을 벌이던 날에는 북한 경비정의 포격으로 ‘제2 연평해전’이 일어나 장병 6명이 죽었다. 그해 초에는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 한 해 전, 뉴욕을 무너뜨린 9·11 테러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한여름, 붉은 악마들의 열기로 가득 찼던 광화문의 겨울은 신효순·신미선을 추모하는 촛불시위로 물들었다. 그리고 12월 북한은 핵 시설 재가동을 공식화했다. 무엇보다 그해 말의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일어났다. 유난히 집단적인 열기가 몰아치던 해였다.

같은 해 3월에 개봉한 ‘복수는 나의 것’은 동시대의 집단적인 요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 모든 소리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자리에 주인공을 홀로 위치시킨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주인공 류(신하균)가 라디오 방송국에 보낸 편지를 아나운서가 읽는다.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 피붙이라곤 누나밖에 없는데요, 절 미대에 보내려고 누나는 진학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몹쓸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것도 그만둬야 했고, 그래서 저도 미대는 잊어버리고 취직을 했지요. 그런데 제가 요즘 어떤 결심을 했거든요. (중략) 제 입으론 말할 수 없어요. 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장애인이니까요. (중략) 나 무조건 누나 살릴 거야. 맹세해. 사실은 오늘 신장 이식수술 신청했어.”

청각장애인 남동생, 희생하며 동생 뒷바라지를 하다 병든 누나, 가난한 남매의 눈물겨운 우애. 영화의 도입부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국내외가 진동하던 저 역동적인 21세기의 초입이 아니라, 산업화 시대의 멜로드라마로 퇴행한 세계처럼 보인다. 아나운서의 멘트가 흐르는 동안, 영화는 이들의 천진한 어린 시절 풍경을 지나 선하고 투명한 눈물이 맺힌 남매의 얼굴에 시선을 멈춘다. 하지만 이 감상적인 세계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의사는 류의 혈액형이 누나(임지은)와 맞지 않아 신장이식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듣지 못하는 류에게 그 말을 이해시키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좌절한 류가 공중화장실에 갔을 때, 때마침 건달들이 벽에 장기밀매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류는 그걸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류는 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 그곳은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공격적인 소음들로 포화되어 있지만, 그에게는 귀마개가 필요없다.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괴로운 세상의 소리들이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으므로 영향을 받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맹목적일 수 있다. 영화는 이 점에 주목하며 류의 호기롭고 감동적인 맹세를 빠르고 무력하게 좌절시키고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향한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착한 사람”이자 “성실한 근로자”인 청년이 불운과 불공정(그는 공장에서 잘린다)한 상황에 몰릴 때, 그에게는 어떤 선택의 여지들이 남아있는가. 그러니까 영화의 전제와 방향은 처음부터 명확하다. 한국사회에서 착하고 성실한데 신체적 장애를 가졌고 가난하기까지 한 자가 앙상한 선택의 회로를 거부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한 번 선택을 하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나의 선택 이후엔 좀 더 줄어든 항목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엔 보다 간단해진 선택지들과 대면해야 한다. 그렇게 강제된 행로의 끝에 죽음이 자리하는 건 그러므로 당연하다. 류와 같은 조건을 가진 인간이 선택의 연쇄에 발을 들이는 순간 도약과 회복은 불가능하다. 상황은 더 나빠지고, 나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더 나쁜 선택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는 경험은 ‘나빠짐’의 쾌속정에 올라탄 것과 같다. 이 영화는 그 쾌속정을 운전하는 데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작위적인 우연도 무릅쓰고 단순한 인과응보의 논리도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인물이 복수를 다짐하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복수를 준비하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류는 장기 밀매원들에게 1000만원과 자신의 신장을 주는 대가로 누나를 위한 신장을 받기로 한다. 그러나 눈을 떠보니 그는 벌거벗겨진 채 길가에 버려져 있다. 신장은 적출되어 대충 봉합된 상태고 1000만원은 갈취당한 것이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누나의 담당 의사와 다시 마주앉아 있다. 의사는 드디어 기증자가 나타났다면서 1000만원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류는 답답할 정도로 순진하고, 상황은 그를 의도적으로 골탕 먹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혹하다.

더한 순간도 있다. 10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중소기업체 사장 동진(송강호)의 딸(한보배)을 유괴한 류가 동진에게서 돈을 받은 날이다. 이제 무사히 소녀를 데려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류가 동진을 만나러 가던 그 시점에 류의 누나는 동생이 수술비 때문에 아이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생이 기쁜 얼굴로 돈가방을 들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누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다. 강가에서 누나를 묻는 동안, 류는 아이가 자신을 부르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사실도 뒤늦게 알아차린다.

‘하필이면 왜 그 시점에’라는 탄식이 나오는 순간들이 이 영화의 결정적인 국면들마다 배치되어 있다. 영화는 그 우연들의 정합성을 묻는 대신, 그에 따른 선택의 필연성과 복수의 필연성에 몰두한다. 우회로는 허락되지 않고 어느새 무조건적으로 돌진하는 저 세계의 힘을 끊어낼 저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한 남매의 선한 멜로드라마로 시작한 세계가 그 마음을 처절히 짓밟으며 오직 폭력과 피와 죽음만을 동력으로 삼을 때, 이 냉소와 위악과 조롱이 어디를 겨냥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거주하는 곳은 그의 계급적 정체성을 적시한다. 류가 속한 곳과 동진이 사는 곳의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거리는 좁힐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동시대적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동진의 회사에서 실직당한 한 남자가 동진 앞에 나타나 할복하는 과정에 영화는 잔인하게도 오래 시선을 둔다. 나중에 동진이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건 가족 전체가 동반자살을 한 끔직한 광경이다. 류의 여자친구 영미(배두나)는 ‘미군 축출! 재벌해체!’라고 써진 전단지를 돌리며 스스로를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본가의 자식을 납치해서 그의 돈을 빼앗고 아이를 무사히 돌려보내는 건 ‘좋은 유괴’라고 강조한다. 후반부 동진도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데 그를 돕는 형사는 돈을 받고 동진의 복수를 묵인해준다.

그러니 과도한 사적 복수와 피로 범벅된 영화 속 장면들의 근원에는 계급투쟁의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하기 망설여진다. 영화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날선 시선으로 노려보는 동안에도 그렇게 포착된 순간을 장르적 쾌감으로 전환하는 데 몰두한다. 폭력의 구조를 쫓으려던 시선은 어느새 폭력적인 장면에 도취된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그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계급적 정체성도 개별성도 역사도 기억도 제거된 채 무의미하게 쌓인 시체 더미들과 피로 물든 강이다. 류는 가장 순수한 위치에서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의 죄를 뒤집어쓰고는 가장 사악한 지점까지 떠밀려온 존재처럼 보인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죽음의 연쇄는 제도의 개입도 철저히 밀어낸다. 공권력이 무력해서 살인이 이어진 게 아니라, 그 연쇄를 유지하기 위해 공권력이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당신이 죽였으니 나도 죽인다’는 내적 규칙 하나만이 영화에 남는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잘못했다는, 혹은 모두에게 죄가 있으니 누구에게도 죄가 없다는 이상하고 허무한 동어반복의 자리로 우리를 부른다. 과격한 아나키스트로 등장한 영미가 허무맹랑한 아이로 희화화되며 퇴장하듯, 이 세계에 잠재된 정치의 웅성거림은 무의미한 농담거리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현실의 얼룩을 충분히 제거 혹은 해소하지 못한 세계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이 복수극에 들러붙은 이물감의 찝찝함을 말했다. 주인공이 들을 수 없는 세계의 불쾌한 소음을 관객은 들을 수 있다는 점 또한 그들의 신경을 긁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은 그들을 종종 영화 밖 구경꾼이 아니라, 그 세계의 연루자로 느끼게 했던 것 같다. 관객들은 불편해했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폭력의 잔혹성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듬해, 복수의 행위를 장르와 신화 안으로 완벽하게 이동시킨 ‘올드보이’가 더 극단적인 설정을 취하고 더 잔인한 폭력을 전시함에도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니 말이다.

▒ 박찬욱 감독은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로 재기
차별화된 ‘복수 3부작’ 연이어 내놔


1963년에 태어난 박찬욱(사진)은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충무로 연출부를 거쳐 서른 살의 나이에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데뷔했다. 흥행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지만, 지독한 영화광 출신의 첫 번째 연출작으로서는 주목을 받았다. 두 번째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그는 평론가로 활동하며 인문학적 교양과 시네필의 시선, 무엇보다도 B급 영화적 취향을 넘나드는 글들을 잡지에 기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7년 선보인 두 번째 작품, ‘삼인조’는 특유의 정서가 엿보였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3년 뒤, ‘공동경비구역 JSA’로 그는 완벽하게 재기했다. 남북관계를 다룬 기존의 영화들이 지닌 한계를 진중하게 돌파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무려 ‘쉬리’의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이 영화의 성공 후, 박찬욱은 자신의 인장이 분명히 새겨진 ‘복수 3부작’을 연이어 내놓았다. 특히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그의 활동범위를 단숨에 세계로 넓혔다. ‘복수 3부작’을 완결한 후에도 그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박쥐’로 거침없이 영화적 상상력을 뻗어나갔다. 2013년에는 할리우드에서 미아 와시코브스카, 니콜 키드만 등과 함께 만든 ‘스토커’를 선보였다. 최근작 ‘아가씨’는 국제적으로도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국내외 영화제들을 휩쓸었다. 그가 설립한 제작사 ‘모호필름’은 그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이경미의 ‘미쓰 홍당무’, 봉준호의 ‘설국열차’ 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현재 박찬욱은 BBC 드라마 ‘더 리틀 드러머 걸’을 촬영 중이다.

<남다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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